1978년 7월6일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른바 유신체제 아래서 치러진 두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 그 첫 번째 선거였던 1972년 12월23일의 8대 대선처럼 9대 대선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고, 박정희 자신이 의장인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였고, 무효표를 빼면 박정희가 100% 지지를 얻었다. 8대 대선에서 두 표였던 무효표는 9대 대선에서는 한 표로 줄었다.유신체제 시절의 대통령 선거라는 것이 비장·공포와 코믹·익살을 버무려놓고 있던 터라, 도대체 그 한 표의 무효표는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가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물론 그것은 은밀한 곳에서의 화제였다. 무효표를 이야깃거리로 삼는 것은 이 우스운 선거제도를 가능하게 한 유신헌법을 비방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는데, 그 당시 헌법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규범이었던 긴급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급조치에 따르면 유신헌법을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넘긴 뒤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긴급조치를 비방한 자 역시 똑 같이 처벌할 수 있었다. 긴급조치는 그 조치를 비판하는 사람을 바로 그 조치로 처벌하는 재귀적(再歸的) 희극성까지 겸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희극성은 '합법적인' 15년 이하 징역과 '불법적인' 고문이 통치자 멋대로 남발되고 저질러질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끔찍한 비극성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제가 붙인 공화국 번호판을 떼어내고 새 번호판을 붙인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5·16 군사반란으로 제3공화국을 선포하더니, 대통령 직선제가 귀찮아졌는지 다시 군대를 앞세워 체육관 선거 제도를 도입하고는 그것을 제4공화국이라고 우겼다. 그 때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