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시인이 있었다. 불우하게도 그는 31세로 요절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숱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머리도 상고머리로 깎고 명동을 누볐다. '카사블랑카'의 배우 험프리 보가트 식 머리라고 재면서, 다른 예술가의 머리를 시비했다. "머리가 길어야 예술가답다는 생각은 낡은 세대의 유물이야. 구역질 나서 볼 수가 없어."막걸리를 마시다 말고 그는 가끔 거리로 뛰어나왔다. "스탠드 바에서 봄이면 진 피즈, 가을이면 하이볼 그리고 조니 워커를 마셔야 하는데, 싼 대폿술도 마음대로 안 되니 이거 부끄러워 살 맛이 없다"며 화난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박인환 이야기다.
구호물자를 골라 입은 이 멋쟁이에게서는 경박한 댄디즘과 속물근성이 물씬하다. 그는 재기 발랄한 언행과 과장벽으로 예술인이 모이는 명동을 헤집고 다녔다. 겉멋의 모더니즘 세례를 받았던 그의 시에서는 기억될 만한 작품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그는 놀라운 반전을 일으켰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두 편으로 대중의 휘황한 갈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왁자하게 부딪치는 창조적 활력 속에 전후(戰後) 문화는 회생하고 자랐다. 그 가운데 명동국립극장이 버티고 있었다. 50년대 국립극장 주변에는 돌체·갈채다방이 있었고, 60년대에는 카페 테아트르와 삼일로·실험소극장이 문화와 낭만, 유행을 이끌었다. 그러나 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의 큰 건물로 이전하면서 명동 문화는 순식간에 쇠락했다.
30년만에 희망이 보인다. 정부가 명동국립극장 복원에 착수했다. 2006년 개관을 목표로 이 전문공연장을 명동의 관광명소로 육성할 계획이다. 내국인과 외국 관광객을 적극 유치한다는 것이다. 당국이 뒤늦게 문화예술 공간은 대중과 가까이서 호흡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덕수궁 옆의 옛 대법원 건물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개조한 것도 훌륭한 일이다.
이에 비해 경복궁 옆 국군기무사 건물이 교외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옮겨오기로 했으나,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어 답답하다. 86년 과천 서울대공원 곁에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이야말로 문화에 대한 무신경의 극치라 할 만하다. 대규모 놀이공원과 경마장 근처에 세워진 이 미술관은 방문객의 접근이 어려워 막대한 비용을 들이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왔다.
썰렁한 농담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외진 데 있어서 서울 강남 사람들에게는 더 좋다는 거 아닙니까. 차 없는 사람들은 오지 않으니까, 더 호젓하고 오붓해서…" 지역간 위화감을 부채질하는 농담이다. 그러나 그 농담은 서초동 예술의전당을 보면, 결코 실없는 소리가 아니다. 예술의전당 역시 대중이 다가가기에는 먼 거리에 있다.
자랑스러운 대표적 문화공간인 국립극장과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은 모두 지하철 역으로부터 걸어서 20∼30분 거리에 있다. 시내버스 또는 셔틀버스가 있으나 대중은 잘 모르고, 또 잘 이용하지도 않는다. 대중과 친숙해야 할 문화시설이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문화 관료의 안목이 짧았기 때문이다. 건물신축이라는 외형적 업적만 생각하고, 문화의 본질에 무관심한 탓이다. 대중의 문화향수를 고려하지 않아, 문화가 성장을 멈춘 것이다.
서울시가 최근 대중 위주로 버스운행을 재편하는 원칙에는 공감한다. 동시에 이 중요한 문화공간들이 대중적 지하철과 가까워지도록 묘안을 찾기 바란다. 어렵지만 문화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뤄야 할 과제다. 용산 미군기지가 이전하고 그 자리에 건립 예정인 문화시설들도 지하철에서 가까워야 한다. 세계 어느 대도시도 주요 문화공간을 외곽의 산 중턱으로 소외시키지는 않는다. 우리의 무신경이 개탄스럽다. '민중 속으로' 라는 브나로드 운동의 문화적 의미를 되새긴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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