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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진보·개혁' 남용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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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진보·개혁' 남용의 혼란

입력
2004.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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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사용하는 어휘의 선택이 잘못되어 사람들의 판단이 잘못된 경우를 종종 본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길이 막히는 이유가 차가 많아져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길이 막히는 이유는 차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차를 타고 너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차가 많아져서 길이 막힌다고 생각하니까, 으레 대책이라는 것이 차량 증가를 억제하는 것이 된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차량 보급률은 선진국에 비해 아직도 낮은 수준이다. 교통체증 해소 정책은 차량소유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차량사용을 억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에서 기업하기 어려운 이유가 정부규제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대책은 규제를 없애고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규제가 선진국에 비해 유달리 많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규제가 많아서가 아니라 규제의 내용과 집행이 저질이기 때문이다. 모호한 규제, 비현실적인 규제, 아무도 안 지키는 규제, 경쟁을 제약하고 특혜와 이권을 만드는 불량 저질규제들이 기업과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규제들은 놓아둔 채 규제 숫자만 줄인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별로 없다.

그런 예는 또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실업자가 늘고 청년실업이 증가하니까 모두들 일자리를 만들자고 한다. 일자리가 늘지 않아 실업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자리는 일거리가 있어야 늘어난다. 일거리를 늘릴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일자리를 늘리자고 하니까 한 사람이 해도 될 일을 쪼개 두 사람이 하도록 하자는 발상이 나오고, 정부기관이나 공기업에서 필요도 없는 사람을 뽑아 국민세금으로 월급을 주자는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국민세금으로 월급 주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일자리 창출인가. 일거리를 늘리려면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경제 살릴 생각은 안하고 일자리만 만들려고 하니까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단어 선택의 오류 때문에 사람들의 판단이 잘못된 경우는 이외에도 많다. 남미나 동남아의 일부 저소득 국가를 가보면 초현대식 아파트 바로 옆에 빈민층 주거지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는 빈부격차가 심해서 큰일이구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요즘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어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소득이 너무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빈곤층이 너무 많은 데 있다. 그래서 대책은 부자의 소득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빈곤선 아래 있는 취약계층의 소득을 올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좋은 선생님은 일등과 꼴찌의 성적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꼴찌가 낙오하지 않고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다. 정부도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소득차이가 큰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부가 좋은 정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지금 우리 사회에 어휘의 선택이 잘못되어 벌어지고 있는 최대의 혼란은 진보와 개혁이라는 말의 남용이다. 우리 국어에서 진보와 개혁이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니까 별 사람이 다 자기가 진보고 개혁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를 의미하고, 개혁은 잘못된 것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와 개혁의 핵심은 개방과 경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보와 개혁의 이름으로 개방과 경쟁을 거부하고 있다. 개방을 거부하는 쇄국주의 논리가 어떻게 진보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진보적이었다는 말인가. 개방과 경쟁을 회피하는 논리야말로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논리다. 무엇이 진짜 진보고 누가 정말 개혁적인지 잘 살펴야 한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규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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