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반란이 터지고 한 달 반 뒤인 1961년 7월3일 반공법이 공포됐다. 그 날은 박정희가 '혁명'의 명목적 리더로 내세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리에 앉힌 육군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장도영이 '반혁명사건'으로 체포된 날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그 전날 스스로 최고회의 의장이 됨으로써 '혁명'의 실세가 누구인지를 만천하에 확실히 했다.'혁명공약' 제1항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임을 천명한 군사반란 세력이 반공산주의를 명시적으로 법제화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박정희 자신의 공산주의자 전력과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박정희는 제 좌익 경력이 미국과 국내 보수 세력에게 불러일으킨 의혹을 서둘러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반공산주의적 제스처를 더욱더 강하게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반공 국시와 반공법은 박정희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의 버팀목에 깔려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고 상했다.
처음 공포될 당시 전문 11조와 부칙으로 이뤄졌던 반공법은 박정희 통치 18년 동안 몇 차례 고쳐지면서 당시 국가보안법의 특별법 노릇을 했다. 국가보안법이 일반적인 반국가행위에 대한 처벌법이었던 데 비해, 반공법은 그 가운데 공산계열의 활동에 대한 처벌법이었다. 반공법은 제1조에서 이 법의 목적을 "국가재건 과업의 제1목표인 반공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공산계열의 활동을 봉쇄하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뒤, 이어 공산계열 반국가단체 가입이나 가입권유, 고무·찬양, 회합·통신, 탈출·잠입, 편의 제공, 불고지(不告知) 등에 대한 형을 열거하고 있었다. 반공법은 1980년 12월31일 그 내용이 고스란히 국가보안법에 흡수되면서 폐지됐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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