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의 트렌드 리더(Trend Leader) 오소림 구찌 홍보과장은 최근 강남의 한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외관만으로도 근사한, 소위 요즘 ‘잘 나간다’는 중식 레스토랑인데도 좋아하는 음식을 고르려고 메뉴판을 보니 쉽게 해독이 되지 않았다. 고급 레스토랑이면 메뉴가 더 잘 돼 있고 설명도 자세히 곁들여 있을 걸로 짐작했는데 실상은 정반대. 영어와 어려운 한자들로만 써있어 무슨 음식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주변 테이블 손님들은 자연스럽고도 익숙하게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식사를 마치고 들른 곳은 윗층의 바. ‘중식당에 웬 바가 있지?’ 의아해 하면서 막상 올라가 보곤 내린 결론은 ‘제법 괜찮았다’는 것. 그녀가 이날 특별한 서비스를 받으며 이색적인 경험을 한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이니즈 레스토랑 ‘미스터차우’다.
중식에 ‘모던 차이니즈’(Modern Chinese)‘라는 새로운 코드가 떠오르고 있다. 중식당이면서도 중식당 같지 않은, 그래서 현대적이라는 의미의 ‘모던’이란 이름표를 달고 나타난 차이니즈 레스토랑 얘기다. 심플하면서도 멋드러진 외관과 인테리어, 특별한 서비스와 새롭고도 맛깔스런 음식 등은 모던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차이니즈 레스토랑에 처음 모던 바람을 몰고온 곳은 ‘이닝’과 ‘빠진’. 최근 오픈한 미스터 차우는 여기에 가세한 셈이다. 하지만 비슷한 듯 해도 세 곳은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
모던 차이니즈는 ‘메뉴 사절’(No Menu)
‘모던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는 손님들이 메뉴를 거의 보지 않는다.’ ‘메뉴가 필요없다’ , 또는 ‘메뉴를 보고 시키는 것이 무의미하다’ 는 표현이 모두 맞다.
미스터차우에서는 손님이 메뉴를 보기 전 직원들이 먼저 질문을 던진다. “어떤 요리를 좋아하세요?” “오늘은 어떻게 꾸며 드릴까요?” 등. 디저트와 커피를 포함, 최소 10가지 코스로만 요리가 제공되는 이 곳의 특징은 직원들이 식단을 구성해 준다는 것. 그날 그날 최고의 재료로 조리한 메뉴를 손님들의 기호와 성향에 맞게 내놓는다.
물론 메뉴도 내놓기는 한다. “메뉴 좀 주세요.” 하지만 영어와 한자로만 씌어진 메뉴를 보고선 으레 이어지는 대화는 “이게 무슨 뜻이에요?” , “이건 무슨 요리죠?”, “메뉴가 왜 알아보지 못하게 써있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손님들의 주문방식도 색다르다. “오늘은 닭고기와 새우 해산물이 먹고 싶어요” “요즘 몸이 허해 고단백영양식으로만 꾸며 주세요” “모시고 온 손님이 돼지고기와 야채가 많이 들어간 메뉴를 좋아하세요” …. 구찌의 오소림 과장은 “처음에는 메뉴를 읽지 못해 당황했는데 속사정을 알고 난 이후로는 주문하는게 더 쉽다”고 말한다. 재료와 맛, 취향, 조건만 얘기해 주면 그에 맞게 가져다 주니 고객 입장에서 더 편하다는 것.
이런 ‘No Menu’ 방식은 선진국의 유명 레스토랑에서는 이미 자리잡은 주문 방식이다.미스터차우의 박준석 본부장은 “처음 메뉴판을 접한 고객들이 의아해 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까지 있었지만 일단 익숙해지고선 더 흡족해 한다”고 말한다.
‘이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라, 르네상스호텔 등에서 20년 가까운 호텔맨으로 근무하다 1998년 이닝을 오픈한 김정석 사장은 “이닝에서 메뉴판은 큰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메뉴에 각종 요리들이 종류별로 적혀 있긴 하지만 손님들은 메뉴에 없는 음식을 더 많이 주문한다는 것.
이 곳에서는 그날 그날 최고의 신선한 재료들을 가져와 메뉴에도 없는 음식들을 조리해 내놓는다. 당연히 메뉴판에 기록 될 시간 여유도 없다.
오늘 키조개가 좋으면 키조개 요리를, 새우가 신선하면 새우 요리를 내놓는 식. 이를 아는 손님들은 직원이 자랑스럽게 추천하는 ‘오늘의 요리’를 자연스럽게 찾게 된다. 기존 메뉴에 얽매이지 않고 당일 최고로 선보일 수 있는 요리를 내놓는 것이 고객을 맞는 최고의 자세라는 철학이다.
청담동의 ‘빠진’ 역시 메뉴에 얽매이지 않는다. 세트메뉴를 시켜도 중간에 손님이 싫어하는 종류가 있으면 과감히 바꿔준다. 그래서 이 곳의 직원들은 메뉴를 직접 교체해 줄 수도 있을 만큼 재량권이 많다. 도세훈 사장은 “손님과 직접 대화하는 직원이 손님의 즐거움을 위해 움직이는 것도 모던 차이니즈의 한 컨셉”이라고 말한다.
모던 차이니즈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
일반적으로 고급 중식당이라면 밀폐된 방이나 적어도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을 고객에게 확보해주는 것이 그동안의 상식. 그런데 모던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는 공간이 확 트여있다.
한마디로 오픈 시스템. 테이블 마다 공간은 널찍하지만 옆자리나 멀리 떨어진 테이블의 손님까지 모두 보인다. 뭘 하고, 뭘 먹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이닝이나 빠진에서는 테이블 사이의 시선을 가로막는 칸막이가 없다. 모엣헤네시의 김정은 팀장은 “처음 고급 레스토랑인데 왜 공간이 트여 있는지 의아했다”며 “하지만 같은 공간을 찾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취향인지를 바라보고 접하는 것도 음식의 맛을 느끼는 것 만큼 흥미로운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미스터차우 역시 커다란 1층 홀이 확 트여 있다. 정연태 마케팅 팀장은 “런던과 뉴욕, LA의 미스터차우에서는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낼 정도로 가족 같은 공간”이라며 “한국 역시 같은 길을 걸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모던 차이니즈는 2인용
혼자 혹은 두명이면 중식당을 잘 찾지 않는다. 일품요리의 양이 버겁기 때문이다.
이닝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두명이 와도 일품요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중식당으로 꼽힌다. 한가지 요리를 양많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요리를 조금씩 내놓는 것. 미스터 차우 역시 최하 10가지 코스를 내놓지만 각각의 양은 조금씩만 나온다. 물론 모든 요리를 다 합치면 배부르고도 남을만 하지만.
그래서 모던 차이니즈 레스토랑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많이 보인다. 여자 두명이서 찾은 손님도 눈에 많이 띈다. 데이트를 하거나 두사람이 와도 만끽할 수 있는 식사와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모던 차이니즈는 모던한 인테리어
중식당 하면 먼저 붉은 색상을 떠올리게 되나 모던 차이니즈는 전혀 다르다. 말 그대로 현대적이고 심플하다. 흰색 중심의 모노톤의 빠진, 검은색 테이블과 의자, 흰색 테이블보가 인상적인 이닝, 밝은 조명에 아크릴 장식이 돋보이는 미스터차우 모두 고객들이 압도당할 듯 강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중식당의 주류는 고량주는 기본이지만 모던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을 더 찾는다. 이닝이나 빠진, 미스터차우 모두 고량주보다 와인과 잘 어울리는 음식, 분위기를 제공한다. 그래서 음식도 기름지지 않고 오히려 담백하다.
/글 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
■ 모던 차이니즈 레스토랑들
모던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음식들도 이름처럼 모던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통 중식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외관과 인테리어가 워낙 현대적인 미스터차우는 중국인 조리사들이 만드는 정통 베이징식 요리를 내놓는다. 중국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고의 재료들로 황제에게 진상하는 상차림을 꾸몄다는 베이징 요리의 맛과 취향을 그대로 가져왔다. 프라이팬의 기름에 볶는 메뉴가 거의 없고 요리 대부분이 담백하다.
이닝에서도 음식 소스 등 주요 재료를 주인이 직접 중국에서 가서 보따리로 사온다. 본토의 맛을 그대로 내기 위해서다. 빠진 역시 중국인들이 집에서 직접 해 먹는 가상채(家常菜) 요리가 중심이다.
●미스터차우 (02)517-2100 청담동 도산공원 건너편
세계적 명성의 미스터차우의 4번째 레스토랑. 주인 겸 건축가인 마이클 차우가 직접 건물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다. ‘레스토랑은 음식을 포함한 총체적 문화공간’이라는 철학을 내세워 시대를 앞지르는 첨단 양식의 인테리어를 선보인다.
●이닝 (02)547-7444 청담동 동궁타운 예식장 건너편골목
음식의 색상을 중시하고 한식을 중식에 응용한 메뉴들도 간간이 내놓는다. 매생이로 만든 중국식 수프가 한 예. 홍순모씨의 조각상, 문범씨의 작품, 500년된 연못 조각품 등 예술가치가 높은 소품들이 눈길을 끈다.
●빠진 (02)3442-0087 청담동 프라다 매장 뒷골목
계단 옆으로 3층까지 뚫려 있는 공간 인테리어가 감각적이다. 중국요리인데도 중국간장과 이탈리아요리에 많이 쓰는 발사믹 소스, 일본 요리에 많이 쓰는 유자가 들어간 폰즈 소스를 고루 쓴다. 뿌리가 있으면서도 변화가 있는 중식요리를 자랑한다.
/박원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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