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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2>소설가 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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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2>소설가 최인호

입력
2004.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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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의 일이니 지금부터 꼭 30년 전이겠다. 그 해에는 경제적으로는 석유파동이, 정치적으로는 3선개헌 반대운동과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해방 이후의 첫 세대들이 저항의 에너지를 담아 기성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막 터뜨리려던 시기였다.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새롭고 젊은 대항문화였다.당시 스물 아홉 살이던 나는 얼마간의 치기와 도저한 자신감으로 한 편의 시론을 적어 한국일보에 보낸다. '이제 낡은 시대는 가고 청년들의 시대가 온다'는 내용의 그 글에 한국일보는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야심만만한 제목을 달았다. 한 시대의 문화를 구체화하고 규정짓는 일이었으니 반향이 엄청났다. 하지만 살벌했던 유신시대 아닌가. 정치 저항의 진앙지로 자처했던 서울대 문리대에 강연을 갔다가 달걀세례를 맞기도 했다. '(송창식 등의)가수 따위가 무슨 우리 세대의 기수냐'는 항변이었다.

뒷날 대마초 파동이 빚어지면서 유신 저항세력으로부터는 '퇴폐주의의 기수'라는 비아냥을 받고, 그들의 문화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으로부터도 숨어 다녀야 했던 웃지 못할 기억도 나지만 '청년문화'라는 말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잡았고, 아직도 건재하다. 세계 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생경했던 그 해, 나는 고 장기영 선생과 의기투합해 6개월간 유럽 전역과 미국 동남아를 도는 '맨발의 세계일주'에 나서기도 했다. 기사 전송시스템이 불비했던 시절, 이 나라 저 나라를 돌고 돌다가 파리에 들러 특파원에게 글을 넘기고 곧바로 되돌아서서 다른 일정을 좇던 기억도 새롭다. 시대를 앞서 시대를 읽는 힘, 그것이 한국일보다.

한국일보와의 인연은 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고교 2년생이던 나는 '벽 구멍으로' 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낸다. 당시의 나처럼 젊다는 느낌, 젊기 때문에 힘차고 기성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새로운 가치에 민감하다는 매력이 한국일보를 선택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황순원 안수길 김동리 선생이 심사를 하셨고, 나는 당선 없는 가작. 신춘문예 사상 전무후무한 그 사건(고교생이 당선)으로 나는 처음부터 주목 받는 '글쟁이'로 서게 된 셈이다. 다만, 신문에도 실리지 못한 그 원고가 당선작 발표 직후 한국일보 화재로 소실된 점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대목이다.

한국일보는 미국 만화 블론디 연재, 미스코리아 대회, 아이스 쇼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 등, 한국전쟁 이후의 당시 사회로서는 파격적이고 젊은 기획들로써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국내언론 최초의 스포츠신문 경제신문 영자신문 발간도 있다. 또 당시의 주간한국은 '사상계' 이상의 영향력으로 젊은이들의 지적·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체였다. 작품 '바보들의 행진'(일간스포츠)부터 '사랑의 기쁨', IMF의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300만부가 팔렸던 소설 '상도'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이어왔고, 이어가고 있다.

언론계 사람들과 함께 앉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한국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에게는 아직 예전의 낭만이 남아 있다." 낭만은 젊음이고, 젊음은 곧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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