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이야기벤 보버 지음/이한음 옮김
웅진닷컴 발행, 2만2,000원
학창시절 한 선생님은 한자 한 자를 가지고 몇 시간 동안이나 수업을 계속했다. 옛 문헌의 다양한 쓰임새를 더듬다 보면 이야기는 으레 인간과 사상, 역사와 문명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쳐나갔다. 그런데도 전혀 산만하다거나 지루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넓고 깊은 지식을 쉬운 말로 차분하게 전하는 모습이 말재주의 모자람을 메우고도 남았다.
그런 이야기꾼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빛 이야기’의 저자 벤 보버가 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지식을 한 타래로 꼬아 펼쳐놓은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고 값지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가물가물하던 ‘빛의 정체’가 어느새 환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의 이야기는 거침없다. 지구와 생명의 탄생, 빛을 감지하는 능력인 시각의 탄생과 진화, 인류에게 열 에너지와 함께 빛을 선사한 불, 빛과 생체, 과학사를 수놓은 파동론과 입자론, 양자론 등 빛의 과학, 색채와 조명, 레이저, 광통신과 광컴퓨터, 천체물리학 이야기가 물처럼 흐른다.
딱딱해지기 쉬운 화제에 그는 문학과 예술, 신화와 종교 이야기를 버무리고, 때로는 재치 있는 농담까지 곁들여 독자의 긴장을 풀어버린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특별히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빛’과 연관된 많은 주제를 하나로 묶어 낸 솜씨는 놀랍다. 전문지식의 뒷받침을 받았을 옮긴이의 깔끔한 글솜씨도 돋보인다.
왜 하필이면 빛인가. 저자에 따르면 빛은 생명을 낳고, 구원하고, 인간의 문명을 이끌었다. 약 30억년 전 원시생명은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얕은 바다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원시생명을 멸종위기에서 구한 것도 다름 아닌 햇빛 에너지를 이용하는 광합성이었다.
또 원시생물이 세포로 발전하고,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추진력인 ‘먹이를 찾고,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정보를 판단할 감각기능의 발달을 불렀고, 빛을 감지하는 시각 기능도 그에 따라 진화했다. 후각이나 청각 등이 상대적으로 둔한 인간은 특히 시각의 진화가 두드러졌다.
그래서 시각의 지배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촉각에 몰입하기 위해 입맞춤을 하거나 사랑을 나눌 때는 눈을 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빛의 정보력은 이미 정착된 광통신과 개발이 본격화한 광컴퓨터에까지 이어진다.
선사시대 인간의 2대 발명품으로 든 불과 농경 이야기도 흥미롭다. 불은 약한 존재로 시각에 의존해 포식자를 피해 온 인간의 어둠에 대한 공포를 덜어 주었다.
동시에 생물이 자기 세포 바깥에서 활용한 최초의 에너지원인 불의 획득으로 1차 에너지 혁명에 성공한 이래 인류문명은 보다 뜨겁고, 강력한 에너지원을 얻으려는 과정이었다고 정리한다. 한편 페르시아어로 ‘사냥보호구역’을 뜻했던 파라다이스(낙원)에서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성서의 이야기가 상징하는 농경사회의 시작은 결국 빛을 이용한(광합성) 먹이생산의 정착이라고 본다.
이런 통찰력도 빛난다. ‘망막의 맹점은 시신경이 눈에서 나와 뇌로 가는 연결통로다. 이 연결통로가 없으면 눈은 뇌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 그 지점에서는 빛을 감지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맹점을 갖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홀로그램이나 레이저광의 발생과 작동원리를 쉽게 설명한 것만으로도 의외로 과학기술에 어두운 사람들에게 이 책은 ‘빛’이 될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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