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교환수단이다. 하지만 현재는 많은 나라에서 중앙은행이 독점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950년부터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모든 은행권과 주화를 독점 발행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말~20세기초에 중앙은행을 설립한 나라들은 우리와 조금씩 다르다.산업혁명의 발상지로 일찍부터 화폐제도가 발전한 영국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와 달리 은행권은 중앙은행에서, 주화는 정부를 대신한 왕립조폐국에서 발행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은행권 발행과 관련해 여타 국가와는 다른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1694년에 설립된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보통 우리가 영국의 화폐로 인식하는 영란은행권을 발행한다. 이 은행권은 영국내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서는 강제통용력이 부여된 법화(法貨)로 유통되지만,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지역에서는 법화인 은행권이 없으며, 지역내 소수 상업은행들이 은행권을 발행하여 영란은행권과 함께 유통시키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스코틀랜드은행과 스코틀랜드왕립은행, 클라이드즈데일은행,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은행, 퍼스트트러스트은행, 노던은행 및 얼스터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는 상업은행들이다. 이처럼 영국에는 상업은행들이 자유롭게 은행권을 발행하던 자유은행제도의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홍콩에서는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및 중국은행 등 3개의 상업은행에서 법화인 홍콩달러 은행권을 발행하고 있다. 물론 이들 세 가지 은행권의 도안도 각각이다.
일본은 헌법에 명시적 규정이 없으나 ‘통화단위 및 주화의 발행 등에 관한 법률’과 ‘일본은행법’의 규정에 따라 은행권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주화는 정부가 발행한다.
그러나 정부가 상업은행이나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직접 주화를 발행하지 않으며, 일본은행을 통해서만 발행하고 있다. 즉, 정부는 일본은행에 정부예금 형태로 주화를 발행하며, 일본은행은 이를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상업은행들이 자금인출을 요구할 때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에 단일화폐인 유로화를 도입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통화동맹(EMU) 가맹국들은 EC조약 규정에 따라 유럽중앙은행이 유일 법화인 유로은행권과 유로주화의 발행·승인하는 독점권한을 갖는다.
이에 따라 은행권은 유럽중앙은행과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주화는 각국 정부가 발행한다. 이와 관련하여 EMU 창설을 주도한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중앙은행에 통화주권(monetary sovereignty)을 원활히 이양하기 위해 헌법까지 개정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정상덕(한국은행 발권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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