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잘 아는 한 중소기업인이 계열사의 부도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접했다. 내수를 주로 하는 그 기업은 제품의 대중적 인지도도 상당하고 독자브랜드로 해외수출까지 하는 건실한 업체로 정평이 나 있던 터라 너무 뜻밖이었다. 업종의 대표기업까지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실물 경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하지만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부도로 내몰린 이유였다.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야 한다는 주위의 계속된 권유를 뿌리치고 토착 경영을 고수하다가 결국 위기를 맞았다는 설명이다. 군 장성 출신인 그 기업인에게 해외진출은 병역기피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反) 애국적 행동으로 생각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대다수 중소제조업체에게 중국으로의 탈출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중국으로, 중국으로 떠나는 중소기업의 엑서더스는 날로 가속화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한국의 대중국 투자가 경제 규모가 10배나 큰 일본까지 제쳐버릴 정도로 거세다. 저임금과 엄청난 내수시장을 가진 기회의 땅을 찾아 국내 기업들이 몰려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빠져나가는 기업들의 빈 공간을 메울 산업적 기반이 마련되지 못해 산업공동화가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이후 10여년간 지속된 일본의 장기불황은 부동산 거품 붕괴가 촉발했지만 실은 70,80년대 붐을 이뤘던 일본 기업들의 동남아 진출에 따른 산업공동화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미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수년째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투자부진이, 날로 깊어만 가는 내수침체와 맞물려 장기불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하고 있다. 하반기가 되면 내수가 살아날 것이라는 정부의 장담과 달리 최근 경제 지표들이 다시 추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막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국정의 최상위 아젠다를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 맞추어 한국을 떠나려는 기업을 잡고, 해외자본과 기업을 불러들이는 노력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노무현 정부는 신행정수도 이전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반대여론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고, 이라크 추가파병을 둘러싼 논란이 날로 가열되면서 경제현안은 뒷전으로 밀려 있는 분위기다. 특히 신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기업들이 가장 기피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국민들은 물론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국가 중추기능의 이전 여부는 미래 경영전략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지 모르는 중대 변화이다. 이러니 외국의 유명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의 '정치적 마비상태(political paralysis)'가 경쟁력 있는 신규 산업의 부상을 막고 있다는 진단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과격한 노동운동 역시 기업투자를 막는 여전한 걸림돌이다. 정치적 구호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한 민주노총이나, 국내 어느 기업에 뒤지지 않는 임금수준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 현대자동차 노조,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생명으로 하는 금융기관이란 특수성에 아랑곳 없이 업무를 중단한 한미은행 노조 모두 분별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아직도 구호일 뿐이다.
/배정근 부국장 겸 경제부장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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