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매월당 김시습이 한때 머물렀다 해서 매월동으로 불리는 강원 철원군 근남면의 복계산 자락. 계곡을 따라 자리한 SBS 대하사극 ‘장길산’ 세트장에 인근 잠복마을 코흘리개 꼬마들이 몰려든다. 길산(유오성)과 봉순(양미라), 갑송(정준하)과 도화(이자영)의 합동혼례 촬영을 구경하기 위해서다.모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유오성은 “3주 동안 죄수로 지내다 보니 이거 원…” 하며 어색해 하는 반면, 정준하는 진짜 새 신랑이라도 된 듯 연신 싱글벙글 하며 카메라폰에 제 모습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1시간여의 준비 끝에 드디어 감독의 ‘슛’ 사인이 떨어졌다.
도화를 이끌고 등장한 갑송이 연신 입을 다물지 못하자, 옥여 스님은 “이 총각 너무 웃어! 면(免) 총각이 그리도 좋은가”라고 면박을 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냥 신이 난 갑송은 “하하하! 그래 땡초야! 좋아 죽겠네! 부러우면 먹물 옷 벗어버려!”라고 맞받아친다. 이 장면은 7월 12일 17부에서 방송된다.
드라마 ‘장길산’은 앞서 7월5일(제15부) 길산이 탈옥해 구월산으로 들어가면서 한층 활기를 띨 전망이다. 마침 이날은 고 정주영 이병철 회장의 성공신화를 모델로 한 MBC ‘영웅시대’가 첫 선을 보여, 두 영웅담의 격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길산’은 황석영의 원작소설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기획 단계에서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닐슨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5월 17일 첫 방송 이후 평균시청률은 17.0%로,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원작의 깊이와 잔재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데다, 선은 굵지만 정감이 부족한 유오성, 사극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묘옥 역의 한고은 등의 연기도 실망스럽다.
KBS 재직시절인 1980년 이 작품을 기획했다가 군사쿠데타로 뜻을 접은 뒤 20여년을 벼른 끝에 제작에 나선 장형일 PD도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사실 소설 ‘장길산’은 드라마화 하기에 참 힘든 작품이다.
원작에서는 길산보다 두령 등 사이드 스토리가 더 풍부하고 재미있지만, 드라마는 그렇게 갈 수가 없다. 또 소설의 잔재미를 살린 성인드라마적 요소가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줬던 것 같다.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시청률이 안 따라줘 고민스럽다.”
장 PD는 “다음 주부터 길산을 끈질기게 쫓는 최형기(박준규)를 등장시켜 라이벌 구도를 강화하는 등 재미를 살려나갈 생각”이라면서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야인시대’를 함께 한 작가 이환경씨가 집필하는 ‘영웅시대’에 대해 “둘다 남성 시청자를 얼마나 잡느냐가 관건이어서 신경이 좀 쓰인다”면서 “판단은 시청자들 몫 아니냐”고 덧붙였다.
체제 전복을 꿈꿨으나 실패한 영웅 장길산, 그리고 체제의 보호 아래 성공신화를 일군 경제영웅.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워 진짜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고픈 요즘, 시청자들은 어느 편에서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까.
/철원=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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