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위원회가 최근 간접광고 규제 강화를 담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9월 초 시행 예정인 개정안에 따르면 제작비 등을 지원한 협찬사에게 광고 효과를 주거나, 특정 상품명 또는 상표, 로고 등을 일부 바꿔 부각하는 행위 등이 모두 금지된다.그러나 이런 움직임에 아랑곳 없이 아니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드라마 속 간접광고는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규제 따로, 현실 따로’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지금 '광고 중'
요즘 시청률 1위를 달리는 SBS ‘파리의 연인’에서 기주(박신양)는 ‘GD자동차’ 사장으로 나온다. ‘GD자동차’에서 이 드라마에 제작비를 지원한 GM대우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카메라에 수시로 잡히는 GD자동차 로고도 GM대우의 그것을 빼닮았다. 태영(김정은)은 곧 복합상영관 ‘CJB’로 일터를 옮길 예정인데, 이 역시 CGV의 협찬에 따른 것이다.
29일 방송된 MBC ‘불새’ 마지막회에서 세훈(이서진)이 사업가로 재기하는 장면은 MP3플레이어 업체 아이리버의 서울 대학로 매장에서 촬영됐다. 다 알다시피 아이리버는 이 드라마 협찬사로, 한 글자만 살짝 바꾼 ‘제이리버’란 이름으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했다.
MBC ‘황태자의 첫사랑’은 한 술 더 뜬다. 세계적 리조트 그룹 클럽메드의 협찬을 받아 주인공들 직업을 아예 ‘클럽메드’에서 도우미를 지칭하는 ‘G.O’로 설정하고, 사호로 발리 타히티 등 클럽메드 휴양지를 순례하며 찍었다. 눈부신 설원과 쪽빛 바다가 한아름 담긴 이 드라마는 무려 20부짜리 ‘클럽메드 영상홍보물’을 자처한다. 유빈(성유리)이 사호로로 여행을 가게 되고, 건희(차태현)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매개체인 ‘반지’ 역시 협찬 제품.
이처럼 PPL(Product Placement)로 불리는 드라마 속 간접광고는 이제 의상 등 단순 소품을 넘어, 특정 기업이 주 무대가 되거나 특정 상품이 극을 이끄는 핵심 소품으로 등장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어느 기업의 협찬을 받느냐에 따라 기획단계에서 설정된 주인공의 직업 심지어 극의 흐름까지 바뀌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외주제작사 "간접광고는 필요악"
간접광고가 판치는 주 원인은 제작비 부족에 기인한다. 현재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지급하는 드라마 제작비는 회당 6,500만~8,500만원 가량. 그러나 웬만한 스타는 회당 출연료가 1,000만원을 넘고 미술비 등이 급증하면서 제작비는 회당 1억원을 훨씬 넘는다. 따라서 기업의 제작비 협찬 없이는 드라마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작사들의 하소연이다.
게다가 드라마 속 간접광고가 기업 이미지 제고나 매출 신장에 적잖은 도움을 주는 것이 실례로 입증되면서 요즘은 기업도 드라마 협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타 드라마의 선례를 들어 노출 빈도와 횟수를 과도하게 요구하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약속한 지원금 지급을 거부하기도 한다.
한 독립프로덕션 대표는 “한 유명 제과업체는 노출 시간이 몇 초 부족하다고 잔금을 주지 않았다”면서 “기업들이 당초 약정한 협찬액의 40% 정도는 수금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극의 내용과 상관 없이, 혹은 극의 흐름을 해쳐가면서까지 협찬 기업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규제 강화가 능사인가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규제 강화에 앞서 제작비 현실화가 시급하다고 외주 제작사들은 입을 모은다. ‘파리의 연인’ 제작사인 캐슬인더스카이의 이찬규 대표는 “방송사가 충분한 제작비를 준다면 작가나 제작진에게 스트레스를 줘가면서 간접광고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면서 “방송사가 부가상품 및 해외 판권을 독식하는 관례도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에서는 간접광고에 대한 시각 자체를 바꾸자는 목소리도 들린다. 드라마 속 스타의 스타일 유행이나 ‘한류 열풍’에서 보듯 드라마가 이제는 다양한 부가가치를 낳는 ‘문화상품’으로 성장한 만큼, 무작정 간접광고 규제를 강화하기보다 적정 선을 제시해 ‘양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양은경 충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시청자들도 이제는 드라마의 스토리 못지않게 그 속에 담긴 소비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더구나 디지털 데이터방송 본격화로 TV를 보며 상품을 구매하는 ‘T-커머스’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만큼, 드라마에 대해서도 문화산업 측면의 위상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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