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전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름의 친구들이 있었다. 꺼벙이, 재동이, 만복이, 고집세… 그들을 만화에서 만나면서 우리는 즐겁고 행복했다. 그 녀석들의 아버지인 만화가 길창덕(75)씨. 그의 만화인생 50년을 돌아보는 '꺼벙이전'이 부천만화정보센터 주최로 7월8일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갤러리에서 개막한다. '꺼벙이' '순악질여사' '재동이' '신판 보물섬' 등 대표작과 대중잡지에 연재한 초기 작품, 최근 그린 캐리커처 등 실물 만화 150여점과 복사본 수백 점이 선보인다. '꺼벙이전'은 15일 부천 한국만화박물관으로 옮겨 11월말까지 계속된다.
"벌써 그렇게 됐나? 거참, 오래됐네요."
길창덕씨는 50년 맞이 감회를 짧게 내비쳤다. 하지만 그게 어디 적은 시간인가. 어느덧 옛날로 돌아간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제대 후 독자 입장에서 만화를 보냈는데 그게 채택된 거야." 그는 1955년 서울신문에 '머지 않은 장래의 남녀상' 등 4편을 투고하면서 데뷔했다. 이듬해 월간지 '실화'에 '허서방'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의 걸음을 내딛은 그는 97년 건강악화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정말 많은 작품을 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확한 작품 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만든 캐릭터만 꺼벙이 등 70여개에 이른다.
"독자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다"는 그는 만화에 그런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모자란 듯하지만 구김살 없는 꺼벙이, 착하지만 실수 투성이인 재동이, 남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일자 눈썹 순악질 여사가 그렇다. 만화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신문, 잡지에 '순악질 여사'를 18년, '재동이'를 13년, '꺼벙이'를 6년 연재했다. "70년대에는 '재동이'를 연재하던 소년한국을 아이들이 '재동이 신문'으로 부를 정도였어요."
꼬마 독자들은 매일 20∼30통의 '팬 레터'를 보내왔다. "고아원 소녀의 편지였어요. 아이들이 양지에 모여 '재동이'를 읽는데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 만화가 어려운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구나.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작년 4월 서울에서 군포로 이사한 그는 짐을 꾸리다 편지 한 통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경기 성남시 태평 3동 111의 138 김용호 어린이가 85년 3월 9일 보낸 편지인데 1,000원짜리 지폐 2장과 500원 짜리 동전 하나, 그리고 이런 사연의 글이 있었다. "아저씨의 만화책 '고집세'를 사기 위해 서점 3곳을 뒤졌지만 못 구했습니다. 그 뒤 을지로 5가의 대형서점을 찾아갔지만 일요일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편지에 책 값을 넣어 보내니 한 권만 보내 주십시오." 18년 만에 편지를 읽은 그는 뒤늦게 김용호 어린이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만나 책을 주든지, 아니면 돈을 돌려주든지 해야 할텐데…"
가장 뿌듯한 것은 요즘 만화가 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불량 만화니 뭐니 해서 옛날에는 색안경을 끼고 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만화가가 훈장을 받습니다. 세상 달라졌지요."
그 역시 2003년 문화관광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대접이 달라진 만큼 만화가의 책임이 막중해졌다고 말한다.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짜내면 아주 좋은 작품 나올 겁니다. 그림 솜씨만큼은 우리가 뛰어나거든요. 얼마 전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오세암'이 대상을 받았잖아요. 실력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세계가 놀랄 겁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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