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는 단기 4289년(서기 1956년) 3월 31일자 한국일보 4면 톱 '천재 자매의 상경' 이라는 기사가 있다. 48년 전 나와 동생 수희가 활짝 웃고 있다. 내가 열 세 살 적 해군교향악단(서울시향의 전신) 협연으로 데뷔하고, 열 한 살 수희는 개인전을 하고 있을 때 청주 출신 방송작가 한운사 선생(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의 추천으로 난 기사다.명동 옛 시공관의 양지바른 담벽에 서서 사진 찍던 기억이 난다. 모두 힘들던 시절이어서 가난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는데, 서울에 올라와 공부해야 할 처지가 딱해 보였는지 기사는 독지가를 찾는 듯한 내용이어서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 기사로 우리들은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서울예고, 수희는 이화여중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창간된 지 얼마 안 되는 한국일보를 참신하다며 늘 구독하셨고, 우리들에겐 다른 신문들과는 다른 활자체가 인상적이었다. 오래 스크랩해두었던 프란시스 잠의 시 '눈이 올 것이다' 라든가, 한국일보 시단 등은 우리에게 문학에 대한 동경을 일깨워주었다.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100만원 고료 연재소설 당선작 '비극은 없다' 시상식에 트리오를 연주하러 갔을 때 작가 고(故) 홍성유씨의 상기된 얼굴 표정, 또 삽화의 모델이 된 막 데뷔한 영화배우 김지미씨의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모습을 본 것도 잊을 수 없다.
그 뒤 수희는 대입시험 전국 1등, 나도 수희도 서울대 수석졸업 등 한국일보의 너그러운 지면에 난 기사들은 우리 자매가 음악과 그림의 길을 걸어가는 데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지금처럼 전문기획사가 없던 시절, 창간발행인 고(故) 장기영 선생은 2년 전 작고하신 지휘자 임원식 선생을 무척 아껴주셨고, 한국일보는 어느 신문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음악인들을 도와주었다. 1970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베토벤 탄생 200주년 연속 연주회는 아마 국내 첫 기획공연이었을 것이다. 당시 베를린필 악장 토마스 브란디스와의 '크로이처 소나타' , 첼리스트 나덕성씨가 합류한 '대공' 트리오, 임원식 선생과 협연한 협주곡 3번 모두 내게는 소중한 추억들이다. 또 1974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가진 귀국 독주회도 한국일보 주최였다.
얼마 전 어머니가 지으신 모차르트홀 개관 연주 때 한운사 선생이 오셔서 옛날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어느새 50년 가까이 세월이 가고 많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신문 속에서 철없이 웃고 서있던 우리들은 초로의 문턱에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한국일보가 한결같이 옆에 있어주어 고맙다. 한편 '천재 자매 상경'의 기사에 보답할 만큼 살아왔는가, 또 살아가고 있는가 새삼 반성하는 마음으로 지난 날을 뒤돌아 본다. 중학교 때 짝 장선용을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으로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장명수 칼럼을 월요일마다 반갑게 읽으며 평생독자로서 한국일보가 늘 새롭게 앞서가는 훌륭한 신문으로 계속 남아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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