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속 할머니는 손주의 고사리 손이 델 새라 호호 불며 뜨거운 알밤을 까먹이는 재미로 살았다. 인자함의 대명사인 할머니에겐 개인적인 욕망이나 포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으며 더 이상 여자도 아니었다. 현실도 그럴까?페미니스트저널 ‘이프’가 창간 7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여름특집 ‘할머니의 힘’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할머니도 여자이고 인간이며 세상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은 소년 청춘 장년 노파가 따로 있지않아. 인생은 한 덩어리, 통째 같은 것이거든. 그 통째가 돌아가는 건데 소녀속에 늙음이 있고 늙음속에 청춘이 있고 그런 거지. 이 시대의 여성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생을 통째로 인식하고 사고해야 한다”는 정연희(69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씨의 주장엔 날이 서 있다.
그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집의 셋째딸로 태어나 도망치듯 대학시절 결혼을 하고 이혼과 간통사건이라는 인생의 심연을 건너면서도 꿋꿋이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홀로서기를 못하는 여성은 자식도 남편도 더불어 누릴 수 없고 항상 노예로 살게된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국선도 최고의 여성지도자인 서복선(77)씨는 아직도 양손의 엄지와 검지만을 가지고 물구나무를 선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갈월종합사회복지관에서 하루 3차례 국선도 지도를 하며 팔팔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결혼 5년째였던 스물넷에 전쟁통에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아이들은 시부모에게 맡긴 채 혈혈단신 상경, 담배좌판을 하면서 돈을 모았고 40대부터 용산지역의 노인과 고아들의 보살피는 사회사업에 뛰어들면서 건강을 위해 시작한 국선도가 평생의 업이 됐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남성에게 기대지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여자라고 밥 한끼 공짜로 얻어먹은 적은 한번도 없어. 그런 기회가 있으면 오히려 내가 냈지. 남자들은 관점이 고정돼있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적인 매너를 활용해서 내가 먼저 자세를 낮추면 그게 더 큰 무기가 돼. 결국은 상대방이 고개를 숙이게 되니까.”
사진작가 박영숙(63)씨는 숙명여대 사학과를 다니면서 사진에 입문, 43세에 사진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벌써 6년째 미친 여성들을 통해 우리사회의 여성관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진작업을 계속하고있다. 사진을 통해서 여성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에 평생을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남자는 머리를 갖고 살지만 여자는 몸으로 살지. 몸에 그 경험이 새겨져있고 훈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고 앞으로 살아갈 준비가 다되는거죠.” 박씨는 10년 후에도 사진을 위해 사는 것, 죽은 뒤에 부끄럽지않은 삶을 살았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힘’ 특집을 추진한 이프 편집장 정미경씨는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이 지상 최고의 가치처럼 인식되고 있는 시대이지만 늙음이라는 것이 구질구질하거나 죄일 수는 없다”면서 “세월을 견디고 이겨내면서 더 강해지고 연륜으로 빛나는 할머니들의 삶을 통해 ‘여자로서 늙기’의 한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 할머니들에게 물어보니
△여자가 나이드는 것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몸에 인생경험을 새겨가면서 현명해지는 것.
△나이 듦이 자랑스럽다고 느낄 때= 인생에 대한 나만의 노하우가 쌓이는 걸 깨달을 때.
△평소엔 뭘하고 노나= 춤추러 가기도 하고 골프도 즐기고 속도 내면서 드라이브도 하지. 남자친구하고 나물도 캐고.
△가장 최근의 성생활은= 이건 정말 비밀인데… 완경은 일흔이 넘어서였지만 아직도 하루 두번은 속옷을 갈아입을 정도야 하하.
△죽음을 준비하며 남몰래 하는 일이 있다면= 삶에 대해 넓은 눈을 가지려고 한다. 시신기증을 생각중이다.
△후배여자들에게 해주고싶은 말은= 나이를 의식하지 말고 삶을 즐겨라. 앞으로는 여성들의 시대가 분명히 온다. 결혼을 하건 동거를 하건 애는 낳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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