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전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자극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반응은 또 다른 자극을 유발한다. 그 자극은 계속 성장한다. 내성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팽팽한 긴장의 자극과 반응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그 자극이 극단에 올라 자멸하거나 반응이 강력해 파멸되면 연극은 끝난다.그런데 이런 비극에는 본의 아닌 희생양이 있게 마련이다.'햄릿'에서 오필리어가 그렇고,'오셀로'의 데스데모나가 그렇고,'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그렇다.
극작가는 극적 정서를 심화하고자 희생양을 배치한다. 그러면 관객들은 극에 빨려 들어가 흥분하고 분노한다. 그런 만큼 감동도 크다. 내가 아는 연극은 아무튼 그런 식이다. 그런데 우리네 리얼한 삶도 그럴까?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세상이 무대, 인생은 연극인가? 그럼 극작가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희생양은 누가 되는가?
딴지를 걸자면 인생은 연극이 아니다. 삶은 생명의 지속 자체지, 가공되고 변형될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희생양의 배치는 그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되지 못한다.
생명에 관한 문제 아닌가? 김선일씨의 살해참극은 정말 화난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극적 배치로도 설명되지 못할 만행이고, 설득력도 전혀 없다.
그 다음날인가 미국대통령이 애석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파병을 기대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짜증난다. 극작가의 사족이고 타이밍의 실수다. 그래서 또 공습을 감행하고 자극이 또 다른 내성화된 반응을 고무하면 또 그것은 정당한가?
간단하다. 잘못 시작된 연극이라면 서둘러 막을 내려라. 그게 제일 빠르고 결과도 좋다. 피는 피를 부른다고 셰익스피어씨께서 복선을 깔지 않았는가! 복선대로 된다.
전쟁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적이 있던가? 승자의 앵글 말고 패자의 앵글도 잡으란 말이다. 제발 몇%가 찬성이네 반대네 하는 산수놀이 하지 말고 그냥 커튼을 내려라. 회계정산은 이해 당사자들이 알아서 끝내라. 제발 손해 좀 보고 살아라. 욕심쟁이 극작가들아.
/고선웅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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