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아리엘 골란 지음ㆍ정석배 옮김
푸른역사 발행·5만 9,000원
2만5,000~1만2,000년 전 후기 구석기부터 지금까지 흔하디 흔한 지그재그 무늬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한반도 신석기 토기에 새겨진 빗살무늬도 하나의 사례지만, 지그재그 무늬는 특히 유라시아 신석기 초기 농경문화에서 크게 유행했다.
1960, 70년대 카스피해 동쪽 카프카스에서 고고학ㆍ민속학을 연구한 우크라이나 출신 아리엘 골란(83)은 토기 등 신석기 예술에서 나타나는 지그재그 무늬는 단순히 선을 반복해서 그은 것이 아니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기 농경문화에서 반복되는 지그재그 무늬가 ‘비’ 즉 ‘하늘의 수분’을 상징하는 암호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여인의 몸과 흡사한 형태로 제작된 토기와 여러 민족의 고대 신화에 대한 분석을 더해 신석기 시대의 ‘하늘 여신’에 대한 숭배 의식도 찾아냈다. 인간이 만들어낸 지그재그, 번개, 꽃, 卍자, 十자, 나선, 삼각형, 사각형 같은 추상적 문양들은 수만년, 수천년 전 지구상에 존재했던 고대인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단서였다.
골란은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에서 4만~5만년 전 구석기 인류가 종교라는 고도의 관념 체계를 발생시켰다고 전제한 뒤 추상적 문양은 종교적 관념을 도식적으로 형상화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문화를 지배한 종교적 세계관의 복원이다.
골란은 생산도구로 대표되는 경제ㆍ사회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문화ㆍ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인류 역사상 엄청난 변혁을 읽어낸다. ‘하늘ㆍ태양=남성’ ‘땅ㆍ달=여성’이라는 식으로 보편화한 신화적 세계관은 비교적 후대인 청동기에 형성됐으며, 그 이전 시대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었다.
카프카스 산악지역 다게스탄에서는 네 점이 사방에 배열된 '十'자 무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十'자 기호는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문화에서 땅에 대한 숭배를 의미했다.
이 책은 “신석기의 숭배 관념 및 상징이 청동기 이후 재(再)사고 됐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청동기 인도유럽인이 신석기 농경민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정복민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신화와 상징의 의미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숭배 상징으로 여겨지는 십자가도 그 기원을 석기시대에서 찾을 수 있는데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지만 의미는 달라졌다. 초기농경시대 유물에 나타나는 ‘十’자 기호는 새의 형상에서 추상화했는데 당시 새는 지옥신의 상징 즉 땅의 신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석기 문화의 파괴와 더불어 종교적 세계관이 변화하면서 정반대로 뒤바뀌어 태양의 상징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卍’자 상징의 의미도 ‘十’자와 똑같은 경로를 밟았다.
책은 총 28개의 주제어로 나눠 유라시아대륙을 주축으로 호주, 중남미 등 세계 각지의 고대 문명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창조한 추상적 기호의 상징 체계를 재구성한다. 한글 번역본의 분량이 1,100여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골란이 수집하고 살펴본 자료는 방대하며 고고학 언어학 민속학 신화학을 아우른다.
이 책은 선사시대 인류의 세계관을 알아내기 위한 일종의 암호 해독서다. 골란의 상징 해독만이 절대적으로 유용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이와 다른 해독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있다. 그러나 번역자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100여개에 달하는 기호들을 교차 비교하면서 십자말 풀이하듯 의미를 찾아냈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평가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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