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은 최근 방한강연에서 "일부 한국 관료들은 북핵을 큰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북핵 위협의 심각성에 대한 한미 양국의 인식이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지구상의 독립국가끼리 그런 식의 협박발언을 하는 것은 문제있다"고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북핵해결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이 안팎에서 시련을 겪고있다. 미국 일각에서는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는 노골적인 불만이 나온다. 미국의 핵심동맹국인 우리가 도리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최근 남북장성급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도 "한국의 군인이 북한 군인과 마주 앉아 핵문제 얘기를 논의하지 않을 수 있냐"는 불평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해 8월 북핵회담이 시작된 이래 어느 참가국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연이은 회담에서 북핵동결의 3단계 해법에 따른 에너지 제공 방안을 제시하는 등 우리 정부가 회담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회담은 미국과 북한의 대결양상으로 진행돼 온 게 사실이다. 우리 정부는 중국과 함께 중재역할을 해 왔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북미간 회담이 진행된 1차 북핵위기 당시에 비하면 우리의 역할이 확대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독자적 영역의 여지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원칙이나 고농축우라늄(HEU) 핵계획 등 회담의 쟁점사항에 대해서는 북한도 미국과 풀어야 할 문제라는 인식아래 북미 양자접촉을 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중재자 역할에서도 제대로 입지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중국의 경우 북한측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미국을 견인하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다. 최근 저우원중(周文重)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북한이 HEU를 갖고 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고 미국은 회담을 가로막는 주장을 그만두라"고 미국을 몰아부친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반면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확고한 공조관계도 구축하지 못하고 북한도 제대로 견인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실제 공식 회담에 앞서 열리는 한미일 3자협의회에서 완전한 합의를 이룬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회담의 궁극적 목표로 본다면 남북이 공히 회담의 주요당사국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북미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실제 회담의 역관계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때문에 당사국으로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견지하면서 북한을 압박하고 미국을 설득하는 솔로몬의 해법이 요구되고 있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 한미동맹의 신뢰가 도전받게 되면서 북한을 견인해야 하는 정부의 협상력이 떨어졌다"고 한미동맹의 복원을 처방전으로 제시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 본보, 국민의식 여론조사
23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3차 6자회담의 막이 올랐지만 우리 국민들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단기간 내에 이뤄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6자회담 참여국 가운데 북핵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로 북한이 아닌 미국을 꼽은 사람이 가장 많은, 의외의 결과도 도출됐다.
한국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미디어리서치와 함께 조사한 결과 북핵문제 평화적 해결 시기를 5년 이내로 생각하는 응답자가 25.1%로 가장 많았다. 이어 3년 내(20.1%), 10년 이후(21.6%), 10년 내(15.2%) 차례였다. 하지만 올해 안(3.6%)이나 내년 중(5.2%) 북핵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답변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국민 상당수가 북핵문제 해결이 장기화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30대의 경우도 북핵문제가 단기간(올해 안 5.0%, 내년 중 5.5%) 내에 해결되기 보다는 3∼5년 가까운 시간(3년 내 20.9%, 5년 내 26.5%)이 걸릴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선행조치를 묻는 질문에서는 주변국의 대북 안전보장 약속을 꼽은 응답자가 36.3%로 가장 많았다. 주변국들이 대북 경제지원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17.7%였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선지원정책'을 펼쳐야 하는 온건한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질문에서 북한책임론인 '북한의 핵폐기 약속 무조건적 이행'(18.7%), 미국책임론인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17.5%) 답변은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결국 '선 핵동결 후 보상'(미국)과 '동결-보상 동시타결'(북한)로 평행선을 달리는 양쪽의 주장 가운데서 국민들은 아직 확실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태도는 북핵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를 묻는 질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미국(37.0%)과 북한(34.5%)을 걸림돌이 되는 나라로 꼽았다. 중국(8.5%) 일본(4.1%) 한국(3.7%) 러시아(2.9%)를 꼽은 응답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한편 북핵문제 해결의 장애물이 미국이라고 본 사람이 37%로 북한이라는 사람 34.5%보다 2.5% 포인트가 더 많은 것도 논란이 있는 결과다. 핵문제의 원인제공이 북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더 많은 양보를 해야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20대와 30대는 미국책임론(45.3%, 49.8%)이 북한책임론(31.8%, 27.5%)을 훨씬 앞섰다. 40대·50대와 60세 이상은 북한책임론(38.7%, 44.9%, 35.4%)이 미국책임론(31.4%, 28.1%, 19.4%)을 앞서는 세대간 인식차도 드러났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전문가 제언/작지만 진전된 합의 6자회담서 도출을
북핵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는 사태악화와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유동적 상황임을 의미한다. 지금 열리고 있는 3차 6자 회담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번 회담을 통해 우리 정부가 상황 악화를 막고 극적 해결의 실마리를 도출해야 함은 당연한 임무이다. 그러나 3차 회담은 미국 대선을 앞둔 시기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작더라도 구체적 합의가 나오지 않는다면 회담의 유용성 자체를 의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우리 정부는 실사구시적 자세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합의도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6자 회담은 북한과 미국의 입씨름으로 시간을 허비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의 원칙적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이로 인해 사실상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함에도 6자 회담은 갈등 당사자의 첨예한 기 싸움과 신경전으로 점철됐다. 미국의 선 핵폐기 요구와 북한의 선 안전보장 요구가 당장 합의불가능한 지점이라면 이를 갖고 공연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양측 모두 합의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마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북한이 보상을 전제로 핵동결의 의지를 일관되게 피력하고 있고 미국 역시 동결에 따른 한국 중심의 대북 경제지원을 이해하고 있는 만큼 이번 회담에서는 적어도 핵동결과 상응조치에 대한 합의 도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요구가 이번 회담에서 또다시 합의의 전제로 부각된다면 논의는 공전될 가능성이 높다. 그 동안 한국 정부는 미국의 선 핵폐기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셈이 됐다. 2차 북핵 위기가 부각된 이후 1년 반이 흘렀지만 지금의 상황은 해결의 기미가 전혀 없는 채로 북한이 핵 억제력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최대의 피해당사자인 한국에 치명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미국의 선 핵폐기 요구가 합의도출에 장애가 된다면 미측 요구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합의내용에서 간접적으로 관철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를 우회할 필요성에 대해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북한 역시 고농축우라늄 핵프로그램의 존재여부를 놓고 여전히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문제는 2002년 10월 북핵 위기가 발생한 계기와 관련된 사안이므로 북한과 미국 모두 양보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이다. 북한이 이를 인정할 경우 그것은 미국의 주장이 옳았음을 사후적으로 입증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북한에게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해 미국의 이해를 구할 정도의 배경설명을 하도록 요구하고 합의문에는 직접 포함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전략을 검토해야 한다. 북한과 미국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HEU문제의 '비상구'를 마련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작지만 구체적 합의를 담아낼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근식 경남대 극동문제硏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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