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은 무섭게 변화하고 있다. 산악인들은 그것을 에베레스트에서 실감한다. 1977년 우리가 세계에서 8번째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그 최고봉에 올랐지만 그때는 1년에 봄·가을 한 원정대씩밖에 입산할 수 없었다. 겨울에는 아예 입산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봄, 가을에도 날씨가 좋은 때를 골라야 했다.당시 고상돈 대원이 8,848m의 지구 꼭대기에 서기까지 우리는 380㎞ 심산유곡을 20여일 걸었고,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다시 36일 간 오르는 대장정이었다. 요즘에야 10여 시간 만에 등정에 성공하지만 당시만 해도 미개척지로 길을 만들면서 올라가야 했기때문에 에베레스트는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난공불락이었다.
지금 에베레스트에는 계절 없이 수십에 달하는 원정대가 몰려 든다. 지난 5월 중순 3일 간 정상은 120명 가까운 등정자로 붐볐다.
이러한 변화는 에베레스트가 낮아졌거나 산악인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대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가능으로 변한다.
우리의 에베레스트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 시대의 리더인 한국일보 창간발행인 장기영 선생을 만난 덕분이다. 요새는 해외원정이 자유롭고 활발하지만 당시 사정이 어떠했는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다. 국민소득이 1,000달러 정도에 불과한 당시에 국내 등산장비나 식량 등을 원정대가 지원받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기업들조차도 한결 같이 후원을 거절할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장기영 선생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섰으니, 그분은 확실히 시대를 보는 안목과 사업추진력이 남달랐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그분은 끝내 우리 원정대의 출정을 모르고 타계했다. 우리가 에베레스트원정에 성공했을 때 국내 매스컴의 보도와 국민의 열광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새삼 물을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원정에 성공한 그 해 우리나라 해외 수출은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일본이 2차 대전 패전을 딛고 일어나 100억 달러 수출을 기록한 것도 일본산악계가 히말라야 자이언트 봉의 하나인 마나슬루를 초등한 해였다. 이것은 히말라야 도전과 국력의 함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후진 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당시의 한국일보가 담당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 해 동아일보는 우리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 18명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큰 신문이 다른 큰 신문의 사업에 대해 이처럼 이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산악계가 이룩한 쾌거인 동시에 그 뒤에 숨은 장기영 선생에 대한 아낌없는 평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일보는 그 역사에서 장기영 사주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에베레스트 원정사에서도 한국일보와 장기영 선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편집자주/한국일보는 창간 20주년인 1974년 에베레스트 정복 의지를 밝히고 '77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 를 구성, 3년 간 훈련 끝에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고상돈 대원이 태극기를 꽂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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