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내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김선일씨의 피랍시점이 당초 정부가 밝힌 17일이 아니라 지난달 31일로 확인되면서 갖가지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결국 김씨는 22일 오전 8∼9시 살해될 때까지 정부의 구명노력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셈이어서 사실 규명의 결과에 따라서는 새로운 파장이 일 가능성이 높다.의혹은 우리 정부가 20여일간 피랍사실을 알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고의로 이를 숨긴 것인지에 모아진다. 또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세 차례나 납치시점을 번복한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억류기간 중 납치범들이 내세운 석방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만일 납치범들이 한국군의 이라크 철군을 요구한 것이라면, 김 사장이 정부에 김씨 피랍사실을 알리지 않고 석방교섭을 시도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피랍시점 때문에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 듯 23일 김 사장이 주 이라크 대사관에 제출한 자필 진술서까지 공개했다.
정부는 또 미군측으로부터 피랍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던 김 사장이 이를 부인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석연치 않은 피랍과정과 구명노력이 늦어진 데 대한 책임을 모두 김 사장에게 돌린 셈이다.
그러나 정부가 21일 새벽 이전에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 이라크 치안을 책임지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나무역측과 군납계약을 맺고 있는 미군 당국이 21일 새벽 CNN을 보고서야 이번 사건을 알게 됐다는 해명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라크 현지 교민들 사이에서는 김씨가 피랍된 지난달 31일 한국 대사관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진술이 이어지고 있다. 석방교섭에 나섰던 사설경호업체 NKTS의 이라크측 파트너인 모하메드 알 오베이디 씨는 방송에 출연해 "한국 대사관측으로부터 석방채널을 열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이로 미뤄 볼 때 정부가 그동안 피랍사실을 인지하고 납치단체와 간접적인 접촉까지 벌여왔으면서도 사실을 숨겼거나, 현지 대사관이 단순 강도사건 정도로 치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미군측의 사전 인지 여부도 여전히 논란이다. 김 사장의 진술서에 따르면 미군 캠프에서 근무하던 가나무역 직원들은 1일부터 김씨의 실종사실을 알았고 현지인 직원들도 1주일 이상 팔루자 전역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또 미군 서비스업체인 AAFES측도 가나무역측의 요청에 의해 김씨의 행방을 추적했다. 김 사장은 지난 20일 모술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미군측과의 석방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가 뒤늦게 "사업차 방문"이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이라크 현지법인으로 설립된 가나무역에 대해서도 미군부대에 각종 생필품을 납품한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는 "무역업체인 것은 맞지만 세부적인 업무는 확인해 봐야 한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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