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유지를 원하는 국민은 전체 12.4%뿐. 한국일보 창간 50주년을 맞아 조사한 설문조사 중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관한 조사 결과다. 냉전시대의 '사생아' 국가보안법 개폐는 이제 '정도'와 '시기'의 문제가 됐다. 국민여론은 성숙했고 17대 국회가 국보법 개폐 문제를 비켜간다면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상황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다수 국민이 국보법 개폐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법률 개폐의 주체가 되는 각 정당간, 정부 부처간 논의와 토론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현재 확실한 당론을 세운 곳은 민주노동당 뿐이다. 민노당은 대체입법 없는 국보법 완전폐지안을 다른 정당의 폐지론자들과 연대해 9월 정기국회에 상정한다는 방침이다. 민노당 관계자는 "국보법 폐지 논의는 17대 국회의 개혁성을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며 "17대 국회 초반에 관철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은 국보법 논의를 한 발짝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 진보세력의 원내 진출이 확대된 17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국보법 개폐문제가 국민과 언론의 뜨거운 관심사가 됐지만 이들 정당은 아직까지 "언론이 개별 의원들을 접촉해 의견을 물은 수준이지 공식 논의된 적은 없다"고 말하는 실정이다. 사실 정체성 시비가 붙을 정도로 이념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보법 개폐에 대한 내부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22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등 국보법의 완전폐지를 주장하는 쪽의 논거는 국보법 자체가 이미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형법에 간첩죄(형법 98조)나 내란죄(형법 87조) 등이 명시되어 있고, 최근 국보법이 적용된 사례는 인권탄압과 사상·표현의 자유 침해 성격이 강한 찬양·고무죄가 대부분이라는 것. 실제 지난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의 93.1%가 제7조(찬양·고무) 위반이었다. 송두율 교수에 대한 1심 판결에서 보듯이 법원은 학술활동 자체와 연구방법(내재적 접근론)을 "맹목적 친북 세력을 양산해 국가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며 유죄의 논거로 채택, 사상과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부르고 있다.
대체입법 주장은 국보법을 폐지하고 시대상황의 변화에 맞게 인권침해 조항을 배제하되 현행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민주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입법을 하자는 것이다.
과거 평민당이 '민주질서수호법'이라는 대체 입법을 추진한 적이 있으나, 현재 대체입법을 주장하는 측도 어떤 내용을 포함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논의가 없다. 국보법을 폐지하고 형법을 개정해 국보법의 취지와 일부 조항을 반영하자는 입장도 있다.
현행대로 유지하거나 찬양·고무죄, 불고지죄 등 일부 독소조항만을 최소 개정하자는 방안은 보수진영이 쥐고 있는 카드다. 이들은 남북분단의 현실이 엄연한 상황에서 국보법의 폐지 또는 대폭적인 개정은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국보법에 덧씌워진 '반인권적 악법'이라는 꼬리표는 법 자체의 하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법 집행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국민 여론은 개정 또는 대체입법을 지지하는 쪽이 다수이고, 완전 폐지나 현행 유지 의견은 소수이다. 설문결과를 보면 '폐지 후 대체입법'(35.4%), '일부 독소조항에 대한 최소 개정'(34%), '완전 폐지'(14.8%), '현행 유지'(12.4%) 의견 순이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국회에서 추진해야 할 사안"이라며 정부가 앞장서서 국보법 개폐논의에 나설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국보법은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영토로 규정한 헌법의 영토조항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헌법 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뿐 아니라 국방부, 통일부 등 관계부처와의 협의 과정이 필요해 법무부가 독자적으로 개폐를 추진할 사안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국보법폐지국민연대가 올 12월을 '국가보안법 폐지의 달'로 선언하고, 서명운동에 돌입하는 등 국보법 개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거워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민노당 이영태 공동정책연구원은 "지금까지 정치권과 정부는 국보법 개폐에 대해 진지한 접근 없이 이슈가 있을 때만 여론의 눈치를 보며 일회성 제스처를 취해왔다"고 비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대표적 '독소' 조항
국가보안법에서 논란이 되는 핵심 조항은 범죄 유형과 처벌을 규정하고 있는 3조∼10조이다. 이 가운데서도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및 이적단체 가입, 이적표현물 소지 등을 금지한 7조와 범죄자임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경우 처벌토록 한 10조는 '코에 걸면 코걸이'식 해석이 가능해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지적된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피의자의 90% 이상은 7조를 위반한 혐의다. 이 조항에 따르면 북한에 호의적인 발언을 하거나 체제 비판적 단체 가입, 사회과학 서적이나 유인물을 소지한 사람은 모두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찬양·고무 및 이적성의 기준이 모호하고 수사기관의 남용 소지가 많아 폐지 대상 일순위로 꼽히고 있으며 유엔인권이사회가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 시대에는 집을 철거하는 당국자에게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말했다가 구속됐으며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비치된 책인데도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출판사 대표가 1998년과 99년 두 차례 구속됐다.
10조 불고지죄 규정은 반인륜적 조항이라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다. 단서 규정으로 친족은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한다고 돼 있으나 친구, 선후배, 사제(師弟)지간에도 자신이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신고해야 한다. 1988년 서경원 전 평민당 의원의 밀입북 사건으로 당시 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조항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은 자와 만난 경우와 국가보안법 위반을 범하려는 자에게 장소나 전화를 빌려준 경우 처벌토록 한 8조(회합·통신 등)와 9조(편의제공)도 '고무줄 적용'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검찰이나 경찰이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구인할 수 있도록 한 18조(참고인의 구인·유치)와 피의자에 대해 두 차례 구속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한 19조(구속기간의 연장)는 일반 형사 사범에 비해 너무 엄격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형사소송법은 불출석한 참고인의 경우 검사가 공판 전에 증인신문을 청구하면 판사가 신문을 하도록 하고 있으며 피의자도 1차에 한해 구속기간 연장을 허용하고 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국보법의 역사
국가보안법은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등 건국 초기의 혼란스런 정정 속에서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을 근간으로 해 탄생했다. 48년 12월 1일 '국헌(國憲)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그것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에 대하여 최고 무기징역에 처하는 법률로 제정·공포되었고, 이듬해 최고형이 사형으로 강화됐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인 61년 7월 국보법에 비해 한층 해석의 여지가 넓은 '반공법'이 공포돼 각종 정치범 사건에 적용됐으나 80년 신군부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공법은 다시 국보법에 통합돼 현행과 같은 체제로 전면 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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