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로맨틱 코미디 한다고 하자 모두 걱정했어요. 정재영, 이나영 커플? 그림이 안나온다 이거죠.” 그럴 만 했다. 여자를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마구 두들기던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 인두로 살을 지지는 아픔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참아낸 ‘실미도’의 한상필. 관객의 뇌리에 남은 정재영(34)은 독기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25일 개봉하는 장진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아는 여자’에서 주연을 맡았으니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그는 이 작품에서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프로야구선수 동치성 역을 맡았다. 그런데 하필 서른 아홉 발자국 떨어진 이웃집 여자 한이연(이나영)이 그를 좋아한다. 라디오 프로그램마다 몽땅 사랑의 사연을 보내고, 휴대폰 선물에 보약 공세를 펼 만큼 집요하다. 그리고 무뚝뚝한 치성도 이연의 맹목적인 사랑 앞에 조금씩 흔들린다.
그러나 주위의 우려와 달리 정작 정재영을 힘들게 한 것은 멜로 연기가 아닌 야구였다. 영화 속에서 그는 한물 간 투수로 나온다. “야구가 이렇게 힘든 줄 처음 알았어요. 실력은 어쩔 수 없지만 폼은 그럴 듯 해야 하잖아요. 두산 베어스 박명환 투수에게서 좀 배웠고 영화에 출연하는 전직 프로야구 선수 김광현씨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아시다시피 장 감독은 엄청난 야구광인데다가 사회인 야구팀 ‘좋은 친구들’의 투수잖아요. 야구 연기에 신경을 많이 쓸 수 밖에요.”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판타지이다. 끊임없이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치성의 모습은 다소 돈키호테적이며 요즘 세태와 거리가 먼 이상적인 사랑이다. “제가 봐도 그래요. 장 감독의 모든 작품은 멜로가 어설퍼요. 그만큼 사랑에 대한 장 감독의 생각이 상투적이면서도 순수한 것이지요. 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작품에는 그 흔한 키스 장면 하나 없어요. 장진은 앞으로도 불륜이나 삼각관계 등 리얼리티 멜로는 못할 거에요. 그게 장 감독 특징이에요.”
그는 어떨까. “제 성격은 동치성보다 한이연에 가까워요. 사랑하는 사람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즐거움을 느끼거든요.”
사랑을 얻기 위해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경기 구리에 살던 그는 경기 남부 송탄까지 달려가 여자를 자동차에 태운 뒤 서울 압구정동으로 출근시켰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 다음 퇴근 무렵 다시 달려가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러기를 두 달. 마침내 여인의 사랑을 얻어 결혼에 골인했다. “프로포즈요? 서른 다섯까지 연기자로 가망 없다고 판단되면 연기를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그게 저의 포로포즈 였습니다. 그때는 연봉 200만원짜리 연극 배우였거든요.”
그는 고교 재학시절 이강백의 ‘봄날’로 동량청소년연극제 최우수연기상을 받으며 배우의 길을 걸었다. 그러기를 16년. 제법 긴 무명시절을 거쳐 ‘아는 여자’로 처음 주연을 맡았다.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연기를 잘 해도 흥행에 실패하는 배우는 외면당합니다. 연기는 못해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 늘거든요. 그러나 흥행은 그렇지 않아요. 이번에 잘 돼야 할 텐데.”
영화 주연도 맡았으니 TV 드라마에 출연할 법도 한데. “TV에서 몇 번 제의가 있었어요. 하고는 싶지만 거절했어요. 몽타주(얼굴)가 안돼서(턱을 만지며 웃는다). 요즘 드라마보면 조각같은 친구들 천지잖아요. 드라마에 저처럼 평범하게 생긴 연기자가 많이 등장하면 저도 그때나 출연하렵니다.”
그의 목표는 생명력이 긴 배우다. “중요한 건 진실이 배어나오는 연기에요. 그런 점에서 최민식 송강호 선배를 좋아하고 존경해요. 늘 그 모습에 그 억양이지만 캐릭터에 진실이 가득 배어 있으니까. 식상하거나 고리타분하지 않아요. 그러려면 결국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깨뜨려 나가야지요.”
시원시원하고 솔직한 그의 성격에 ‘이 남자,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장진 사단
‘아는 여자’는 장진 사단의 영화다. 장진 사단은 문화창작집단 필름있수다를 이끄는 장진 감독과 작업을 함께 하는 사람들로 배우 정재영 신하균 임원희 류승범 등이 그 멤버다. 이들은 ‘기막힌 사내들’ ‘킬러들의 수다’ ‘묻지마 패밀리’ 등에서 호흡을 함께 맞췄다. 그래서 장진하면 으레 이들을 떠올리고 사당패처럼 사단으로 묶는다.
정재영은 장진 사단의 장점을 서로간에 딱 들어맞는 호흡에서 찾는다. “작업을 자주 하는 것은 그만큼 잘 맞고 편하기 때문이죠. 결국 작품 색깔을 잘 낼 수 있어서 유리합니다. 사단으로 분류된다고 다른 감독 작품 기피하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분류가 굴레로 작용할 수도 있다. 관객들은 이들의 작품 속에서 같은 색깔을 찾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전작의 이미지가 선입견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전작이 망가졌으면 후작도 악영향을 받는다. 장진 사단에게는 ‘묻지마 패밀리’가 대표적이다. 임원희 류승범 등이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우정 출연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이들 외에도 즐겨 손발을 맞추는 영화인들이 적지 않다. 봉준호 감독은 ‘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에서 변희봉, 김뢰하를 기용했으며 김형구 촬영감독과 이강산 조명감독은 ‘비트’ ‘무사’ ‘살인의 추억’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에서 콤비로 활약했다.
/최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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