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974년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한 지 만 30년이 지났으나, 도입 당시부터 제기된 평준화 논란은 국가 성장전략과 맞물려 갈수록 확전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반대론자들이 평준화제도를 교실붕괴와 사교육비의 주범으로 몰면서 공공연히 폐지를 주장하는 형국으로까지 발전했다.반면 평준화 유지론자들은 교육의 형평성과 기회균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계층 통합, 우수인재 확보 등과 직결돼 있는 평준화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평준화 30년의 공과
평준화가 우리 교육에 미친 영향은 제도 도입 직전의 교육상황과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74년 이전만 해도 중학교 학생의 약 30%가 과외수업을 받았고, 지방에서 서울이나 부산의 중학교로 전입한 학생이 1만5,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입시 경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중3병'이라고 불리던 명문고 입학경쟁은 이제 사라졌다. 평준화가 중학교육의 정상화, 고교간 격차 해소 등에 기여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헌법재판소도 95년 평준화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과열된 고교 입시경쟁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평준화 제도의 입법목적은 정당하다"고 판시, 이런 긍정적 평가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교실붕괴 현상으로 공교육의 위기가 거론되기 시작한 99년부터 평준화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했다. 특히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1년 평준화 해체를 언급하면서 논란이 더욱 확대됐다. 평준화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현행 평준화 정책이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불러와 미래의 우수 인재 확보와 국가경쟁력 확대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학생의 학교선택권 제한, 사교육비 증가 등도 평준화의 문제점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들은 평준화의 틀을 과감히 깨고 학교에 학생 선발권을 되돌려줘야 공교육의 위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발제도의 문제인가, 교육의 문제인가
보다 나은 조건에서 교육 받고 싶어하는 개인의 권리와 최소한의 사회통합 전략으로서 평준화가 필요하다는 사회 일반의 목소리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대립각은 선명하지만 보다 나은 교육이라는 명제 앞에서 의견수렴은 가능하다.
폐지론을 앞장서 반대해온 전교조도 지난 30년 동안 속칭 '뺑뺑이' 추첨제도에만 안주해 온 평준화 정책이 한계에 부딪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입시교육 강화, 사교육비 증가, 사회적 위화감 확대 등에 대한 해결방안이 없이 평준화 해체만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폐지론자들도 "평준화의 대안은 과거의 비평준화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과 같이 학교선택권을 보장하는 경쟁력 있는 학교체제로 가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준화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게 유리한 논거만 부각하거나 상대방을 이념공세로 몰아치는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대표적인 것이 학력의 하향 평준화이다. 최근 KDI가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한 주범이 평준화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자, 한국교육개발원(KEDI)은 평준화 지역의 성적이 비평준화 지역에 비해 오히려 높았다는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으며 맞붙었다.
그러나 두 지역의 교육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어렵고, 그동안 표준화한 학력검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한 적이 없어 평준화 지역 내에서도 얼마나 학력저하가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정진곤 한양대(교육학) 교수는 "학문적으로 정확성이 결여된 연구결과로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박부권 동국대(교육학)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외국처럼 거주지 인근학교로 추첨 없이 배정하는 방법으로 전환하되, 학생이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상위 3∼5% 내의 우수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학교가 다양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재갑 교총 대변인은 "우선 선지원 후추첨제 확대 등을 통해 학교선택권을 일정 정도 늘리는 현실적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는 사립학교에 자율권을 부여해 교육의 다양성을 확보해나가되, 교육의 수월성(excellency)과 평등 두 가치를 모두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 본보, 국민의식 여론조사
평준화제도를 비판하는 최근의 공세는 전에 없이 거셌지만,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평준화의 기본 틀은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는 가계의 경제력 차이와는 무관하게 동등한 조건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구상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당연히 신봉해야 하는 가치로 믿어져 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교평준화 폐지 논란에 대해 응답자의 60.5%가 '일부 보완해야 하지만 기본 틀은 유지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평준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도 18.9%나 됐다. 반면 '완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16.6%에 그쳤다.
이 같은 결과는 2년 전 교육인적자원부의 의뢰를 받아 동국대 박부권 교수팀이 실시한 설문조사와도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당시에는 찬성이 65.0%로 반대(32.5%)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이는 현행 고교 교육의 문제를 선발배정 방식인 평준화제도가 아니라 대학입시로 인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교육체제에서 찾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평준화 유지'라고 응답한 사람들은 60세 이상(24.0%)의 노년층과 중졸 이하(31.6%)·소득 100만원 미만(23.6%)의 저소득층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수정·보완'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은 20대(67.5%), 학생(75.4%), 월소득 400만원 이상(66.3%)의 중산층에서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기본 틀은 유지돼야 한다고 보면서도 '수정·보완'의 필요성에 무게를 둔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는 점은 폐지론자와 유지론자 양측이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평준화 보완책으로는 '학교 안에서 능력에 따른 수준별 수업 확대'(34.7%)가 가장 높게 나왔고, '사립고에 학생선발 및 교육과정 자율성 부여'(26.7%)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확대'(15.3%) '선지원 후추첨 지원방식 확대'(13.3%) 등의 순이었다.
/김영화기자
■ 교육부의 보완책은
평준화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우수인재의 양성이 경쟁에 의한 선발이 이뤄지던 시절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2001년 실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국가간의 학력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교생은 전체적으로 매우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상위 3∼5%의 학생들은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준화의 성과는 분명히 있었으나, 일부 한계가 드러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교육인적자원부도 평준화 보완의 초점을 획일적 교육의 탈피에 맞추고, 대학의 교과목을 미리 이수해 대학에서 학점으로 인정 받는 AP(Advanced Placement)제 도입 등 영재교육을 활성화하고 수준별 이동수업을 2007년까지 50%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 현재 부분적으로 실시되는 선지원 후추첨제를 확대해 학교선택권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김인회 교육복지정책과장은 "선지원 후추첨제는 평준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학군 내 몇 군데의 고교를 지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특수목적고 숫자를 늘리는 데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자칫 평준화 체제가 깨질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은 특목고 확대를 반대하는 명확한 입장을 여러 번 표명했다.
한국교총과 일부 교육학자들은 사립학교에 선발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 평준화 문제를 푸는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정진곤 한양대(교육학) 교수는 "부실한 형태의 사립은 공립으로 전환하고 종교계 학교나 대학 부속학교 등 비전이 보이는 사립학교엔 확실한 자율권을 부여해 교육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경제부 등 경제부처와 한나라당에서 주장하는 자립형 사립고 확대방안도 평준화 보완책으로 거론된다. 자립형 사립고는 현재 전국 6개 학교에서 시범운영 중인데, '귀족학교'로 변질돼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교육부는 2005년까지 자립형 사립고 운영성과를 지켜본 뒤 확대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이밖에 현재의 추첨 배정방식을 초·중학교처럼 거주지 인근학교로 추첨 없이 배정하거나 비평준화 지역에까지 평준화를 도입하는 방안 등도 제시되고 있다. 현재 평준화는 6개 광역시와 17개 중소도시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전체 일반계 고교의 50.4%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비평준화 상태이고, 특히 강원 전남 경북 충남은 도 전체가 비평준화 지역이다.
/김영화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