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를 만나던 곳은 늘 종로서적이었습니다. 몇 층인지만 약속하면 되었지요. 다만 용돈이 궁해 가장 얇은 책, 시집을 한 권씩 사곤 했던 것이 안타까웠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이상한데 그 당시에는 베스트셀러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냥 책장 사이를 다니며 책을 보다가 좋은 책을 찾아 구입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 한 권 선택하는 데 꽤나 힘들었지요. 적어도 머리말, 목차, 후기 정도는 읽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베스트셀러라는 코너가 생겨났고, 처음에는 서점 한켠을 장식하던 베스트셀러 코너가 지금은 분야별 베스트셀러만 모아도 수백 권이 될 정도로 커졌습니다. 사회는 부자 순서대로, 학교는 성적 순으로, 책은 판매량 순으로 줄을 세웁니다.
"한국에서 천만 명이 이 영화를 보았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일본으로 치면 삼천만 명이 한 영화를 본 것입니다. 한국 영화계의 잠재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무슨 영화인지 모르지만 일본 영화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 이야기랍니다. 책도 마찬가지지요. 베스트셀러를 안 읽으면 대화의 자리에 끼지 못하는 세태. 과연 이런 현상이 우리 문화계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더 창의력, 개성, 상상력을 중시하는 문화계에서 한두 영화 또는 몇 권의 책이 전 국민을 휩쓰는 현상이 잠재력이란 말입니까?
이제 아무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상상과 사고, 창조의 길을 찾아내는 일이 독서의 목적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은 새벽에 잠을 깨우는 자명종이 아니고 열심히 발을 마사지하는 찜질팩도 아닙니다. 물론 돈을 세는 계수기도 아니지요. 책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흔들어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높여주는 깨달음의 죽비요, 우주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손전등 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책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아야 합니다. 그 길만이 출판계가 당장 먹기 좋은 패스트푸드의 달콤함을 벗어나 향긋한 채소 씨앗을 뿌리는 길이자,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황을 극복하는 힘찬 첫걸음일 것입니다.
/김흥식 서해문집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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