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개 병원이 소속된 보건의료 노사가 90여일 간의 교섭기간 동안 주 40시간 근무 등 요구안에 대한 협상을 벌인 것은 파업전날 단 하루뿐이다. 산별 교섭에 뜻이 없던 대학병원측은 그 석 달의 기간 대부분 협상 참여를 기피했다. 파업 3일전에야 노사가 협상 석상에 마주 앉았지만 사측이 실무자급 대표를 내세우고 노조는 이에 자격시비를 벌이면서 파업직전까지 공전을 거듭했다. 파업 전 교섭기간 내내 기 싸움으로 일관한 셈이다. 노사간 절차적 시비, 한치 양보 없는 대립은 병원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노사교섭의 병폐다. 파업이나 손해배상청구, 가압류 등 '벼랑 끝 전술'로 유혈사태를 빚은 다음에야 일정 수준에서 봉합되는 것이 상례였다.소모적인 노사갈등이 되풀이 되는 것은 노사간 상호불신과 힘의 우위를 점하려는 긴장관계가 합리적 해결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속되고 있는 대립적 노사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립관계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노사분규로 인한 근로손실을 선진국과 비교하면 근로자 1,000명당 근로손실 일수(1998∼2000년)가 독일 1.1일, 일본 1.4일, 영국 14.1일인데 반해 한국은 무려 124일에 달한다. 더욱이 노사분규는 근년에 들어 더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참여 정부가 내세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적어도 지난 1년 동안은 실패했다. 두산중공업, 화물연대, 조흥은행, 철도파업 등 일련의 파업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화와 타협'과 '법과 원칙'사이에서 무원칙한 행보를 보이면서 노사 모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사실 대립적 노사관계의 원인을 놓고도 경영계나 노동계는 평행선을 달린다. 경영계 쪽은 "비교섭 대상을 협상테이블에 올리는 등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하는 반면 노동계 쪽은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불성실한 교섭태도와 불투명한 기업경영이 적대적 대립을 부추기는 요인이다"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노사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비정규직 문제 해결방안 등 갖가지 쟁점에서 사사건건 대립하며 좀처럼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대립적일 수 밖에 없는 노사가 쟁점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문제는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합리적 해결이나 조정을 위한 틀이나 절차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고 있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대립적 노사관계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우선 합리적 해결을 위한 틀을 마련하는 일이다. 노사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 최근 재편논의가 진행중인 노사정위원회는 바로 합리적 조정을 위한 큰 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사 합의안을 내기 어려운 현행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거나 합의 이행을 담보할 수단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재편된 노사정위마저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개별부문이나 사업장의 노사갈등을 조정하고 분규를 사전에 예방하는 정부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조준모 숭실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선진국과 비교할 때 노사갈등 조정을 담당하는 노동위원회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노동위원회의 전문성을 대폭 보강하고 합리적 안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등의 사전 예방적 조정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본보, 국민의식 여론조사
과거 춘투(春鬪)로만 표현되던 노사분규가 이젠 하투(夏鬪), 추투(秋鬪), 동투(冬鬪) 등 사계절 투쟁으로 변할 정도로 노사문제는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 가운데 하나다.
한국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들이 바라보는 노사문제가 다소 진보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노사 전문가들은 참여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젊은 층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커진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대립적 노사관계의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난다. 대립적 노사관계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국민의 절반 가까운 47.2%가 '불투명한 기업 경영'을 지목했다. 다음으로 '노조의 무리한 요구'(27.7%), '법과 제도의 미비 및 형평성 부족'(21.6%) 순으로 꼽았다. 특히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낮거나 고학력층이 대립적 노사관계의 원인을 불투명한 기업경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50대는 대립적 노사관계의 가장 큰 원인을 불투명한 기업경영으로 꼽았으며 유일하게 60세 이상만 불투명한 기업경영(25.9%)보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49.0%)가 노사갈등을 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학력별로 보더라도 대재 이상(52.9%), 고졸(46.4)이 불투명한 기업경영을, 중졸이하는 노조의 무리한 요구(40.3%)를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노조의 경영참가에 대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과반인 57.6%를 차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 39.6%보다 크게 앞섰다. 연령별로는 20∼40대는 바람직하다가 과반을 넘었으며 50∼60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답이 더 많았다. 직업별로는 농업이나 임업, 어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반면,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 등 대부분은 노조의 경영참가를 바람직하게 보고 있다. 비정규직 차별문제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기업이 정규직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 차별철폐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응답이 39.1%로 가장 높았다. '노사 자율에 맡겨야'(31.5%), '임금동결 등 정규직의 양보'(26.9%)가 뒤를 이었다. '기업 해결론'은 화이트칼라(46.2%), 블루칼라(40.0%)와 학생(47.6%)에서, 연령이 낮을수록 높은 응답률을 보였고, 자영업(40.6%)이나 1차 산업 종사자들은 '자율적 해결'을 상대적으로 많이 지지했다. 응답자의 상당수가 노사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 노조의 경영참여 외국사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운동은 임금투쟁에서 고용안정으로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더불어 비합리적, 불투명한 경영에 대한 견제로서 노조는 경영참가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반면 경영자측은 노조의 인사경영권 참여가 노조의 전문성 부족에 따라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고, 노사갈등을 오히려 심화 시킬 우려가 있다며 강력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진국의 노조 경영참여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본격화된 점을 감안하면 국내 노조의 경영참여시도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임금과 근로조건, 고용과 해고, 투자 및 계획 등 제반 문제에 관해 기업수준에서 결정하거나 준비, 준수하는데 노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사실 유럽에서 노조의 경영참가는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고 보편적이다. 노조의 경영 참여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기업경영과 근로조건 등에 대해 주주와 공동으로 결정하는 공동결정제도를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의사결정기관인 감독위원회에서 종업원대표가 1/3이상이거나 주주대표와 동수를 이뤄 사실상의 동등한 결정권을 가지며 의결에서 가부 동수일 경우 위원장(주주대표)이 결정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는 독일과 유사한 형태의 경영참가를 단체협약을 통해 정하고 있다.
반면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미국은 유럽과 달리 임금과 고용조건에 대해서만 단체협약을 통해 조정할 수 있을 뿐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에 노조가 관여할 수 없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오일쇼크와 80년대 불황기를 거치면서 협력적 노사관계를 통한 생산성 향상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사측의 주도로 작업장내 의사결정에 참여하거나 크라이슬러사 등에서 노동자가 기업이사로 참여하는 예가 나타나고 있다.이 경우도 적자경영에 부닥친 사측이 노동자로부터 임금 등의 양보를 받는 대가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하는 양보교섭의 일환이다.
이른바 산업민주주의에 기반한 노동자의 경영참가가 보편적인 유럽식과 주주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인사경영권은 철저히 기업에 맡겨진 미국식이 상반된 방식이지만 모두 역사적인 배경을 토대로 발전해 사회적으로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립적 노사관계로 진통을 겪고 있는 국내 실정에서 독일식 경영참여가 기업의 의사결정지연을 가져와 심각한 경쟁력 약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반면 한편으론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노사의 협력적 신뢰를 가져올 수 있는 장점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노조의 참여 수준이 어느 정도일 때 기업경쟁력과 노사관계 안정화를 위해 적정하느냐가 관건이다. /정진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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