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16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는 39세의 여성 김수임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김수임은 한국 전쟁 발발 직전 처형되었다. 김수임이라는 이름은 늘 이강국(李康國)이라는 이름과 묶여 거론된다. 이강국은 경성제국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한 인텔리 공산주의자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두 사람은 애인 사이였고, 김수임이 간첩 활동을 한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이강국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 '여간첩 김수임'에 대한 가장 흔한 변론이다.김수임의 해방기 간첩 활동은 그가 미국인 고문관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던 서울 옥인동 자택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미군정이 이강국에게 체포령을 내리자 김수임은 그를 옥인동 집에 숨겼다가 베어드 대령의 차로 월북시켰고, 그 뒤에도 자신의 집을 거점으로 이강국과 연락을 취하며 이북의 대남 공작 활동을 도왔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김수임과 이강국, 베어드 대령의 관계가 참으로 묘하다. 이들의 '삼각관계'는 치열한 첩보 활동과 이념 전쟁의 긴장을 배반하듯 평화로웠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김수임은 개성 출신이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여전에 진학했고, 학교 선배 모윤숙을 통해 다섯 살 위인 이강국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강국의 죽음도 김수임의 죽음만큼이나 비극적이었다. 이강국은 한국 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이뤄진 남로당 숙청 바람에 휩쓸려 1955년 목숨을 잃었다. 김수임이 남한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듯, 이강국도 북한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중요 죄목이 간첩 활동이었다는 것도 똑같다. 김수임의 간첩 활동이 북한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를 조종했다는 이강국의 간첩 활동은, 북한 당국의 주장에 따르면,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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