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을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에게 바치는 묘비명이자 살아남은 자의 회고록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희생된 영령들도,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우리 현대사의 전쟁의 상처를 짊어진 이들이다. 김용성(64)씨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기억의 가면'(문학과지성사 발행)은 그의 처음의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데뷔작인 1961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 '잃은 자와 찾은 자'에서 작가가 고발했던 전쟁의 비극과 이데올로기의 허상이, 40여 년 뒤의 작품에서도 깊고 넓게 재현되었다.
김용성씨는 '리빠똥 장군' '도둑일기' 등의 소설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치열한 역사의식을 보여온 작가다. 1960년대 남미로 이주한 우리 동포들의 질곡의 삶을 그린 장편 '이민'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 '기억의 가면'에서도, 우리 현대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진지하게 담겼다.
'기억의 가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시간적인 배경으로,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브라질, 중국, 베트남 등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 소설은 역사가 한 집안의 가족사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를 증언한다. 문체는 차분하고 담담하지만 그 속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가늠하기 어렵도록 무겁다.
일본 고베에서 태어난 이진성은 1945년 고베 대공습으로 아버지를 잃고 귀국해 아버지의 본처의 손에서 키워진다. 성장한 그는 일본에 남아있는 생모와 누이를 만나기 위해 고베의 생가를 찾아 나서 누이와 극적으로 해후한다. 이것이 한반도에 드리워진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다.
소설가인 진성은 브라질의 독자에게서 삼촌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브라질로 떠난 그는 독자에게서 전쟁의 생생한 실상을 전해 듣고, 삼촌의 행방을 찾아 중국으로 간다.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성은 삼촌의 시점으로 된 소설을 써나간다. 한국 전쟁의 기억은 이렇게 되살려진다.
한편으로 진성이 고통받는 것은 베트남전쟁의 악몽이다.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참혹한 경험을 했던 그의 기억은 우리 역사가 짊어진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아, 그것은 늪가에서 어른거리는 망령들의 속삭임이다. 죽고 싶지? 총을 든 검은 망령들이 줄지어 늪을 지나 무성한 갈대와 유칼리나무와 야자나무로 빙 둘러쳐진 사원 안으로 사라진다. 너도 죽고 싶지?" 진성을 괴롭히는 기억 속 망령의 속삭임은 베트남전쟁 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의 망자들의 안타까운 비명이다.
'기억의 가면'은 특히 다채로운 서사 방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고지마 노보루의 '한국전쟁', 홍쉬에쯔의 '항미원조전쟁회고'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자들의 기록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등장시키고, 작중 인물의 허구적 수기를 소설화하고, 죽은 사람의 시점으로 된 소설을 끼워넣는 등 소설 쓰기의 방법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모색과 다양한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작가는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기억의 가면'은 "기억과 사실과 상상의 조화"라는 게 김용성씨의 설명인데 그것들은 각각 개인과 역사와 문학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실제 고베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귀국한 뒤 60여 년을 살아온 작가의 개인적 체험, 그만큼 굴곡진 한국의 역사, 그 개인과 역사가 공유한 기억의 가면을 벗겨내는 글쓰기 작업이 한 권의 묵직한 소설로 빚어졌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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