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5일 북한에 대해 핵 계획을 포기할 경우 "북한 경제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겠다"고 제안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노 대통령이 1년 이상 북한 핵 문제 때문에 남북관계에서 '숨 고르기'를 해왔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날 제안은 구체적이고 진전된 제안이다. 우선은 곧 열린 3차 6자 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해 북한 압박용 '당근'을 제시한 것으로 보여진다.노 대통령이 제안을 한 장소를 6·15 4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로 잡은 이유도 곱씹을 만하다. 핵 계획의 포기와 획기적 경제지원은 2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을 경우 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고받을 핵심 의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제안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을 암중모색하는 과정에서 취한 이니셔티브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청와대측은 이날의 제안은 완전 핵 폐기의 최종 시점보다는 북한이 핵 폐기를 위한 실천적 조치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단계적 경협을 통한 대북지원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미 정부는 '동결-검증-완전폐기'의 3단계 북핵 해결 로드맵을 제시했었다. 청와대측은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은 "북한 경제 개발을 위해 전산업 분야에 걸쳐 북핵 해결과정에 따라 단계적, 부문별 남북경협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범위에 대해서는 "에너지, 교통,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각종 산업설비의 현대화, 공단개발, 제도개선, 교육인프라 등 산업생산능력 향상을 위한 협력"이라며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고 주변국과 관계를 정상화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지원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 토론회 발언 내용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은 15일 정상회담을 '역사적 사변'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남측이 경제협력에 속도를 더 낼 것을 촉구했다.
리종혁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참여정부와 민간기업 대북진출문제' 토론에서 "중요한 군사전략지대인 개성지구와 금강산지역을 남측에 뚝 떼주고 특혜도 충분히 제공했다"며 "최근에 와서야 남측 당국이 개성공업지구 건설에 관심을 보였지만 아직 그 속도가 매우 완만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협력사업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국의 책임"이라며 전력, 철도, 도로 등 사회인프라 구축에 있어 남측 당국의 협조를 당부했다.
북측은 경협 폭을 넓히자는 다양한 의견도 제시했다. 민금성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수익성만 생각해 피복임가공 같이 손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분야에 치우치면 진행중인 협력사업도 잘 되지 않을 것"이라며 "단순 상거래와 가공에서 벗어나 경공업부터 첨단산업까지 협력분야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철범 조국통일연구원 참사는 "북남 경제협력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제협력이 아니고 국제경제관계의 관례와 질서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다"며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상호주의에 전적으로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정부의 경협확대와 군사분야회담 연계전략을 경계하는 뜻이었다.
북측 대표단은 한미공조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박영철 조국통일연구원 부원장은 "미국은 '핵문제와 남북관계 연계', '대북강경조치' 등으로 6·15 공동선언 이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며 "한미공조와 민족공조가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상원기자
■盧대통령 "北사람들 처음 만나" 리종혁 "金위원장이 안부 전해"
"북쪽 사람을 오늘 처음 만납니다. 아주 반갑습니다." "장군님께서 남북이 현재의 좋은 흐름을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는 안부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6·15 남북 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리종혁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접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
이에 노 대통령은 토론회 개회식에서 축사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 시 전폭적 대북지원을 약속, 김 위원장의 인사에 화답했다. 남북 정상의 색다른 간접대화로 남북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높이는 자리였다.
이날 오전 토론회장인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던 도중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의 안내로 리 부위원장이 환담 장으로 들어온 것. 노 대통령은 "만나보니 자주 보던 분 같은 느낌"이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리 부위원장은 탄핵사태를 염두에 둔 듯 "그 사이 아주 고생하셨다. 건강한 모습을 뵈니 기쁘다"고 답했다. 이어 리 부위원장은 수첩을 꺼내 김 위원장의 안부인사를 전했지만, 친서 전달이나 현안과 관련된 특별한 제안은 없었다.
이날 토론회에는 여야 정치인들이 총출동, 김 전 대통령과 남북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4년 전 평양에서의 경험들이 아주 생생하다"고 말을 건네자 김 전대통령은 "남북관계가 그 동안 많이 발전했는데 나머지 문제들을 맡아서 잘 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박 대표가 남북문제에서는 전향적으로 협조해 희망적"이라고 칭찬하자 김 전 대통령은 "여야가 전부 협력해 통일을 향해 나가니 앞으로 큰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리종혁 부위원장은 이날 오후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총장으로 있는 서울 삼청동 경남대 통일관 개관식에도 참석했다. 리 부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토마스 허바드 주한 미 대사와 조우했다. 이에 허바드 대사가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를 건넸지만 리 부위원장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머금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리종혁 "DJ 대북 특사설은 금시초문"
김대중 전대통령(DJ)은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남북공동선언에 기록된 남북간 약속임을 상기시키며 답방을 재차 촉구했다.
김 전대통령은 이날 특별연설 말미에 "한 가지 제안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하고 싶다"며 답방문제를 꺼냈다. 그는 "답방이 이뤄져야 남북간의 신뢰가 확고해지고 평화와 교류협력을 위한 진전이 이루어질 것이며 전쟁의 그림자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대통령은 또 "남쪽의 국민은 김 위원장의 서울방문을 따뜻이 환영할 것이고 우리 국민은 남북의 정상이 다시 한 자리에 앉아 민족의 협력과 번영과 통일을 논의하는 모습을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김 전대통령의 김정일 위원장 답방촉구 발언은 여권 내부에서 심상치 않게 흘러나오는 'DJ 대북 특사설'을 한층 증폭시켰다. "답방 성사를 위해 DJ 스스로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은 이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며 일단 부인했다. 그는 김 위원장의 답방가능성에 대해서도 "윗선에서 결정할 문제"라며 "때가 되면 자연히 이뤄지지 않겠느냐"며 즉답을 회피했다.
김 전대통령은 북핵 해법도 제시했다. 김 전대통령은 "해결책은 간단하다"며 "북은 핵 문제와 관련해 세계가 납득할 만한 결단을 내리고 미국은 북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제사회에 진출할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반도 문제는 우리 민족의 의사가 존중되는 가운데 그 해결책이 찾아져야 한다"며 "최근 주한미군 감축계획도 남과 북이 긴장완화와 군비태세의 조절에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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