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주한 미 해군사령관 벙커, 전쟁상황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이 가장 신경 쓴 것은 서해 5도 상황이었다. 북방한계선(NLL)부근 남북 해군의 대치와, 인천과 연평 대청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 호송작전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해군은 미사일과 고속정 전력에서 뒤졌다. 이 때문에 북 경비정은 걸핏하면 일부러 남쪽으로 고속기동, NLL을 넘어설 듯 위협해 비상을 걸도록 했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되돌아가는 장난질까지 했다.그러나 전체 전력이 팽팽히 맞선 그 시절, 간첩선과의 교전을 빼곤 해상 무력충돌은 없었다. 미군이 남북 움직임을 감시한 탓도 있겠지만, 양쪽 모두 충돌을 겁냈다. 팀 스피리트 연합훈련이 서해 5도에서 전면전이 촉발되는 전쟁 시나리오를 토대로 했듯이, NLL 해역의 폭발성은 컸다. 20여 년이 지나 우리 전력이 크게 앞선 상황에서 휴전이래 최대 해전이 터진 아이러니는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위험도 높다는 교훈을 일깨웠다.
그 두 차례 해전은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 1999년 연평해전은 북쪽이 긴장완화를 틈타 NLL 무력화를 노린 것이 발단이라지만, 당면 목적은 꽃게잡이였다. 여기에 우리 군은 함정세력과 성능 우위를 이용, 이른바 배치기로 낡은 북 경비정을 밀어냈다. 그러나 도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거세자 한층 공세적 몸싸움을 감행, 당황한 북쪽이 총격으로 대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 타격을 주었다.
2002년 거꾸로 우리가 당한 서해교전은 '연평대첩'이 낳은 비극이다. 승리에 들뜬 분위기에서도 진짜 전문가들은 NLL과 꽃게잡이 분쟁을 국제법 원칙을 좇아 타협할 것을 충고했다. 이를 외면한 가운데 꽃게잡이 철이 돌아와 북 경비정이 NLL을 위협하자, 해군은 밀어내기 작전을 되풀이할 태세를 보였다. 그러자 악몽을 기억하는 북쪽은 선제공격으로 우리쪽에 뜻밖의 피해를 안겼다. 그러나 강경론이 아무리 높아도 전면전을 각오한 보복은 할 수 없는 남북의 숙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이렇게 보면, 남북이 우발충돌 방지를 위해 공용주파수와 시각신호에 합의한 것은 뒤늦은 각성이다. 어렵게 이룬 화해국면에 걸맞지 않은 유혈충돌까지 치른 뒤에야, 피차 양보하고 협조하는 것이 상책임을 깨달은 셈이다. 공용무선통신을 보조하는 깃발과 불빛 신호는 쌍안경 거리 안에서만 식별할 수 있어 보안성이 높다. 이를 테면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연합함대는 무선침묵을 지킨 채 깃발과 불빛신호만 썼다. 이처럼 적을 기습하는 데 유용한 신호를 원치 않은 충돌을 막는 데 쓰게 된 것은 그만큼 획기적이다.
이런 진전은 크게 보면 남북이 '공동안보'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안보개념을 주창한 브란트 전 서독총리는 동서 긴장이 극에 이른 때, 당장 현상(現狀)을 바꾸지 않으면서 현상극복을 지향하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비전으로 제시하고 그 평화전략의 요체는 적과의 신뢰구축을 통한 안보협력이라고 외쳤다. 전쟁은 곧 상호절멸을 부를 시대에 평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이는 서로 적대를 완화해도 위험하지 않다고 스스로 안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고 보았다.
4년 전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은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남북이 군사적 긴장완화를 넘어 상호협력에 이른 것은 더 없이 값진 결실이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항구적 평화로 이끌려면, 그 길을 앞서 개척한 브란트의 지혜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초 이렇게 설파했다.
"안보를 강화하려면 동맹이 필요하다. 한층 안전한 것은 적을 격멸하는 것이지만, 이는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신뢰구축을 통한 군축과 함께 적대적 군사동맹의 이완, 궁극적 해소가 동반해야 한다. 적이 스스로 안심할 수 없으면, 기적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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