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 40㎜짜리 백구(白球)는 꿈꾼다. 지상에서 76㎝ 솟은 폭 1.525m, 길이 2.74m의 직사각형 판을 시계추마냥 '핑!' '퐁!' 누비는 백구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2.7g의 가는 몸매로 쉴새 없이 그물을 넘는 까닭은 날카로운 강 스매싱이 되어 난공불락 중국의 만리장성을 뚫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비지땀을 양푼으로 쏟아내는 선수들이 있다.
13일 태릉선수촌 탁구장은 "이얍∼"하는 괴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 장대비에 젖은 양 체육복이 등판에 착 들러붙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의 기쁨에 주먹을 불끈 쥔 사나이는 한국탁구의 간판 김택수(34)다.
"딱 한번만 더해요, 네?"하며 달라붙는 앳된 얼굴의 띠 동갑 유승민(22)의 얼굴도 땀으로 흥건히 젖긴 마찬가지. 숟가락 놓기 무섭게 달라붙는 탁구대가 징그럽지도 않은지 꿀맛 같은 10분 휴식시간이 됐어도 도무지 라켓을 놓을 줄 모른다.
"내기를 했거든요." 김택수의 귀띔을 듣고서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운동은 최대한 즐겁게 해야 한다"는 게 새롭게 탁구 국가대표 코치를 맡은 김택수의 신조다. 올해 두 차례 국제대회(코리아오픈, 싱가포르오픈)에서 유망주 유승민―이철승조는 중국의 왕하오―궁링후이조에게 무참히 깨졌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이철승)
무려 18년이다. 태극마크를 휘날리며 1991년 세계랭킹 3위, 92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단식과 복식 동메달을 따낸 펜홀더 드라이브의 귀재 김택수는 98방콕아시안게임 남자단식에서 중국의 강호들을 잇따라 무너뜨리고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값진 승리였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선수생활을 접고 지도자로 나선 그는 "올림픽의 영광은 후배들의 몫"이라고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가 될 중국과의 아테네 혈전에서 한국 남자탁구가 내민 카드는 복식이다. 세계랭킹 4위를 꿰찬 유승민과 올림픽 4연속 출전을 일군 베테랑 이철승이 공수조화를 이뤘으니 금상첨화.
문제는 중국을 꺾을 비책 마련. 바로 적을 아는 것이다. 일단 중국의 완벽한 기술은 세계 최강임을 인정하자.
하지만 만리장성도 빈틈은 있는 법이다. 중국은 90년대 말부터 유럽의 셰이크전형을 개량한 '중국식 펜홀더 이면타법'(라켓 양면을 자유자재로 사용)을 수련해 탁구 권좌를 유지했다. 김 코치는 "중국의 이면타법 공략과 적응만이 승리의 열쇠"라고 단정했다.
그는 "이면타법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선 우리의 장점인 날카로운 선제공격을 활용해 심리적으로 압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유승민에겐 장기인 포핸드 드라이브를 더 빠르게 칠 수 있도록 체력 강화를 시키고 있고 미숙한 네트볼 처리도 보완하고 있다. 노련한 이철승에겐 안정적인 경기운영을 당부했다.
유승민도 김 코치의 지도에 공감하고 있다. 유승민은 "(김)택수 형이 매일같이 직접 이면타법의 다양한 구질을 2,000∼3,000개씩 던져주는 볼 박스(Ball Box) 훈련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는다"고 말했다. 또 "잔미스를 좀처럼 하지 않는 것도 배울 점"이라고 했다.
이철승 역시 "(김 코치가) 훈련을 많이 시키고 아이들을 잘 다독이는 모습이 듬직하다"며 "상승세인 (유)승민이에게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어줘 꼭 금메달을 따 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땀이 마를 새도 없이 탁구대로 돌아간 '3인의 태극 핑퐁 전사'는 색다른 내기탁구를 시작했다. "자, 기왕 시작한 거 금메달 따보자고. 땀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어." 김 코치의 구령에 맞춰 백구가 다시 탁구대를 누빈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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