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한여름 못지않게 푹푹 쪘던 11일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전산정보고 3층 음악실. 두터운 털 스웨터를 입은 배우 최민식(42)은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탄광촌인 이곳에서 그는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감독 류장하)의 겨울 장면을 찍고 있었다. 지난달 프랑스 칸영화제를 들썩였던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어느새 깊은 산골 탄광촌의 트럼펫 교사 현우가 돼 있었다. "솔직히 이곳 촬영장 분위기에 아직 100% 적응이 안 됐습니다. 지중해와 맞닿은 칸 해변의 삼삼한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12일 동안 외국 나갔다 도계읍으로 다시 들어오는데 마치 군대 위병소를 통과하는 것 같더라니까요. 이제 1학기 끝, 2학기 시작입니다."
칸 영화제에서 자신이 주연한 '취화선'이 2002년 감독상(임권택), '올드보이'가 올해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면서 월드 스타로 떠오른 최민식. 그러나 이런 '성과'가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낮췄다. "물론 기분은 좋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마이클 무어 같은 유명 감독이 칭찬을 하는데 안 좋을 리 없죠. 그렇다고 제 인생관이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저는 그냥 배우일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언제든 밑바닥으로 추락할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씁쓸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출연하는 드라마가 시청률로 죽을 쑬 때 엘리베이터에 탄 동네 아줌마들이 그러더군요. 요즘 왜 TV에 나오지 않느냐고. 1994년 '서울의 달' 때만 해도 방송사 로비에서 마주치면 '점심 먹었냐?'고 살갑게 묻던 기자들은 아예 아는 체도 안하는 겁니다. 그러다 후배 한석규가 영화 한편 같이 해보자고 해서 한 게 '넘버3'(97년)입니다. 제2의 인생은 그때 시작됐죠."
"혹 TV로 돌아갈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손사래를 친다. 무슨 천년만년을 살겠다고 공장처럼 드라마를 찍어내는 그곳으로 돌아가겠느냐는 것. "감독과 소주 마시며 토론하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여관 가서 한숨 잘 수 있는 이 좋은 영화판을 왜 떠나겠냐"고도 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삼촌이나 아버지 역으로 밀려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정 안되면 박찬욱 감독이나 류장하 감독 찾아가 "먹여 달라"고 떼 쓰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배우가 안 됐으면 화류계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원래 놀고 먹는 체질이거든요. 세상에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머리 굴리고 부지런히 사는 건 제 타입이 아닙니다. 약사 남편이 돼 셔터 문 내리며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인생이죠."
이런 인생관은 어쩌면 올 추석 개봉하는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 모습을 닮았다. 트럼펫 연주자인 현우는 심사위원 비위만 맞췄으면 번듯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 연희(김호정)에게는 고백도 못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음악학원에서 일하자는 친구의 말을 뒤로 하고 탄광촌 중학교의 관악반 교사로 내려왔다. "한마디로 현실 부적응자에 정도 많고 모질지 못한 놈"이라는 게 최민식의 명료한 캐릭터 분석. "오히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맑고 순수한 탄광촌 아이들이다. 현우는 아이들을 통해 음악과 삶과 사랑의 소중함을 배운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영화판에서 알아주는, 늘 노력하는 배우. '취화선'에서는 단소를 배웠고, 이번 현우 역을 위해서는 5개월째 트럼펫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은 '올드 랭 사인'을 직접 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른 아침, 도계 촬영장 숙소에서 고이 잠든 스태프를 깨우는 것도 그의 기상 나팔소리다. 실제 트럼펫 강사인 올해 스물 다섯의 김평래씨에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최근 만두 파동에 대한 심정이 궁금해졌다. '올드보이'에서 15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군만두만 먹었던 그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다. 다시 자신을 가둔 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된다. "처음 그 얘기 들었을 때는 어찌나 억울하던지 집 냉장고에 있는 만두를 몽땅 내버렸어요. 그리고 이건 진짜 하고 싶은 말인데 먹을 것 갖고 장난치는 사람들,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시키고 전재산을 몰수해버려야 해요…."
/삼척=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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