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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무협의 변화로 사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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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무협의 변화로 사회 읽기

입력
2004.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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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이나 무협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황당한 기연(奇緣)과 싸구려 외설이 반복되고 엉터리 문장과 조악한 편집으로 포장된, 싸구려 남성 판타지의 대명사라는 것이 무협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가 아닐까.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을 돌이켜 보면 무협이 종전의 면모를 탈피해서 새로운 문화적 코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퓨전무협을 표방한 드라마 '다모'가 '폐인(열광적인 팬)'들을 양산하며 신드롬을 일으켰고, 무협의 전통적인 공간을 고등학교로 옮겨놓은 영화 '화산고'가 주목을 받았다. 올해 초에는 '이소룡 세대'를 자처하는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소룡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제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향수에 젖어들기도 했다. 또한 영화 '아라한 장풍작전'은 무협이 현대인의 굴절된 무의식을 비추는 문화적 거울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밖에도 무협의 전통적인 문법을 해체하고 한국적 신무협의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좌백의 '대도오'가 올해 초 재발간되었으며, 서울대 중문과 전형준 교수는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라는 단행본으로 학문적인 조망을 펼쳐 보인 바 있다. 무협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적 의미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등장하는 무협의 코드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여성성 또는 여성적인 측면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 '다모'나 영화 '와호장룡' 등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무협이 더 이상 남성성의 우스꽝스러운 질주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영웅의 로맨스를 위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싸움의 중심에서 사건을 이끌어 가는 능동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성의 독주로 치달을 때 나타나는 황당무계함을 견제하고, 남성적 판타지에 서정적인 깊이를 부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또 다른 측면은 융합(fusion) 또는 해체의 경향이다. 영화 '와호장룡'은 동양이라는 지역적·문화적 경계 바깥으로 무협을 불러내었고, '킬빌'은 세계 각국의 무술을 혼성모방하여 독특한 폭력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또한 만화 '열혈강호'는 비(非)영웅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여 무협의 문법적 경계들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좌백의 '대도오'에서는 영웅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던 하급무사들의 실존적 내면풍경이 섬세하게 표출된다. 외부적으로는 이질적인 문화지평들과의 융합을 시도하고, 내부적으로는 기존의 관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수행하는 지점에서 무협의 다양성이 분출하고 있는 셈이다.

무협은 가상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영웅의 활약에 감정이입함으로써 현실의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장르이다. 따라서 무협에는 현실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얻게 되는 심리적 보상물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실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결코 아무 곳으로나 도피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좌절된 욕망을 보상할 수 있는 지점을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협은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것과 사람들이 욕망하고 있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르이기도 하다.

무협의 안과 밖을 둘러싸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은 정의로운 힘에 대한 갈구 또는 힘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갈망이다. 힘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표출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의 무협은 영웅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었던 힘을 분산시키고, 외부의 경계를 허물어 다양한 지평들과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협은 흑백논리를 강요하는 이분법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차이를 긍정하는 유연한 체계에서 힘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협으로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초식 하나를 얻는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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