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17일, 가을 바람이 서늘하고 서울의 달이 자취를 감춘 어두운 밤, 살인사건이 성동경찰서에 접수된다. '1963년 7월 12일생, 본적은 충남 청양, 이름은 김홍식. 옥수 9구역 골목길에서 20㎝ 크기의 흉기에 찔려.'
그 해 1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운 서울역 광장에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쪽 밖에 없는, 스물 아홉 살의 나는 서 있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다 끝내 서울역 지하도를 집으로 삼은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백원짜리 동전 몇 개로 전화를 걸었다. 고향인 충남 청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춘섭(최민식)이 기다렸다는 듯 덥석 전화를 받았다.
"춘섭아, 네가 부탁한 취직 건 잘 해결됐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내일 서울 올라와라. 참, 전에 말한 돈은 준비됐지?" "홍식(한석규)아 정말 고맙다. 내 그럴 줄 알고 밭뙈기 팔아 돈 마련해 놓았다." 춘섭의 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옥수동 달동네에 방 한칸 얻어보려고 고향친구 춘섭에게 취직을 미끼로 돈을 뜯어내려는 참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지하도로 내려간다. 몇 분전까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다른 놈이 차지하고 있다. 인정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댄다. "저리가 이 새끼야."
이로써 내 죄는 시작됐다. 후회나 부끄러움은 없다. 이래저래 어차피 서울은 '절망'일 뿐이다. 아니 돈과 빽이 없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해준 스승이었다. 원수 같은 가난에 쫓겨 고교 1학년을 중퇴하고 상경한지 10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해 나이트클럽 웨이터까지, 가리지 않고 뼈가 빠지도록 일했지만 오로지 실패와 아픔만이 똬리를 틀었다. 그래서 밤이면 어둠에 몸을 맡긴 채 복수를 다짐하곤 했다. '세상에게 내가 당한 수치, 가난, 아픔을 고스란히 아니 곱절로 돌려주겠어.'
한 줌, 알량한 도덕은 내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퇴물 춤꾼 박선생(김용건)에게서 배운 사교춤으로 유부녀를 뱀처럼 꼬여낸 뒤, 푼돈을 뜯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꽃뱀 미선(홍진희)과 짜고 스스로의 욕정에 홀린 사내들을 협박하는 사업도 꽤 짭짤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사기를 친 나를 찾아내 씩씩거리며 주먹을 날렸던 춘섭을 비웃으며 일찍이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 새끼야, 죽도록 일해도 서울에 손바닥 만한 집 한칸을 마련하기 힘든 이 더럽고 썩어 빠진 세상에 한 방에 돈을 모은 것 말고는 탈출할 길이 없지 않냐"고. 그런 나를 춘섭은 물론 영숙(채시라)까지 벌레 취급했고, 대놓고 "비열하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내 삶의 유일한 경구(警句), "보이스 비 앰비셔스."
기회는 뜻밖에 쉽게 찾아왔다. 돈 많은 이혼녀(이미지)는 탈출구 없는 내 삶에 드리워진 황금 동아줄이었다. 그 줄을 잡기 위해 나는 미선을 가차없이 이용했다. 애초부터 내게 사랑 따윈 일개 사업수단에 불과했다. "일단 결혼해서 재산을 빼돌린 다음에 같이 사는 거야." 이 간교한 꼬드김에 넘어간 미선은 통장을 털어 내 결혼비용을 마련해줬다. 뿐만 아니라, 경찰에게 덜미가 잡힌 나를 보호하기 위해 대신 감옥에 들어가는 희생까지 치렀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쓰라린 배신으로 보답했다.
그래서 그 삶이 즐거웠냐고 묻지마라. 내 몸이 꺼져 버릴 것처럼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깎아주는 과일을 받아 먹으며 대형 TV를 보는 안락한 저녁을 즐겨본 자는 알리라. 더구나 내 꿈은 그보다 웅대하지 않았던가. 아내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다렸다.
그러나 서울의 달이 초생달에서 만월이 되기 직전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년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미선은 복수의 칼을 들이밀었다. 게다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아내는 거꾸로 제비였다는 사실을 들어 나를 집에서 쫓아냈다. 여전히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사기꾼에 불과했던 나. 이 기막힌 불행의 연속에서 나는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미선이 보낸 깡패에게 칼을 맞던 그날 밤. 피칠갑한 몸으로 시멘트 바닥에 누워 나는 상상했다. '공장에 취직해서 악착같이 돈 벌고 영숙과 결혼해 알콩달콩 자식을 낳고 살았더라면, 그 자식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출세하는 걸 봤더라면 행복했을까?' 내 신분상승의 드라마는 영원한 꿈인가. 버러지 같은 내 삶이 순식간에 나비로 진화하길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어쩌면 나는 춘섭이처럼 그냥 허물 벗기에도 그저 기꺼워하는 인생이었어야 하는지 모른다.
병원 영안실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기 직전 "사랑하니까, 그냥 사랑하니까"를 입버릇처럼 되뇌던 주인집 딸 영숙이를 떠올렸다. 그녀를 차마 사랑할 수 없던 나는 "너 같은 놈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출을 해야 한다"고 밤마다 독백하지 않았던가. 내 호주머니에 남아있던 건 토큰 6개와 천원 짜리 지폐 2장 그리고 영숙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한 장. "야채장사라도 하며 같이 살자"는 영숙이를 단념시키기 위해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떠난다고 쓴 거짓 편지를 건네주지도 못한 채 나는 죽었다.
내 죽음 뒤 허겁지겁 달려온 영숙에게서 "넌 나쁜 놈이 아냐. 너는 착하고 불쌍하고 외로웠던 거야"라는 속삭임을 들었다. 고졸 경리사원으로 달동네를 벗어나는 게 꿈이었던 그녀. 어쩌면 나는 그녀로 인해 가슴 떨렸는지 모르겠다. 영숙의 입맞춤을 끝으로 '악의 꽃'보다 진하고, 선인장보다 독살스러웠던 내 인생은, 가련한 내 영혼은 그렇게 '굿바이'였다. 생의 가장 순정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1994년 10월 17일 밤의 일이었다. (도움말= 작가 김운경)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작가가 말하는 '서울의 달'
1992년 히말라야에서 트레킹을 하던 김운경 작가의 머리 속에서 '서울의 달'은 탄생했다. 서른 아홉의 나이에 드라마 '형'을 끝내고 무작정 떠난 그 길에서 작가는 '홍식'이란 인물을 건져 올렸다. "심심하던 차에 영자신문을 봤는데 '미드나잇 카우보이' 소개기사가 실렸더군요. 시골청년들이 뉴욕으로 상경해 여자를 꼬셔 보려고 하는 영화인데 그걸 보고 힌트를 얻었죠."
그는 KBS에 '서울의 달' 기획서를 건넸다. 대답은 뻔했다. 제비족이 주인공인데다 주무대가 캬바레인 드라마를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6개월 넘게 책상서랍에 있던 것을 '방송에서 물의가 되지 않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MBC가 꺼내들었다.
그러나 캐스팅이라는 또 다른 난관이 '서울의 달'을 가로막았다. 원래 홍식은 유인촌, 춘섭은 훗날 '궁예'로 유명해진 김영철을 캐스팅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인촌은 이탈리아 유학중인 부인을 만나야 한다는 이유로, 김영철은 출연료가 맞지 않다며 거절했다. 결국 춘섭에 한석규, 홍식에 최민식이 낙점됐다.
제작진은 '야망의 세월'에서 꾸숑 역을 맡은 최민식의 터프한 이미지가 있어 그랬다고 설명했다. 김운경 작가는 항의했다. "맘에 들지도 않는 배우들로 캐스팅 됐는데, 역할까지 엉뚱하게 맡기면 드라마 망가진다"고. 그래서 맞바꾸어 홍식―한석규, 춘섭―최민식의 조합이 탄생했다. "처음엔 둘의 연기력을 반신반의 했는데 1, 2회 녹화 뜬 걸 보니까 '이 친구들이 연기가 세구나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서울의 달'은 어렵게 떴다.
/김대성기자
■"보이스 비 엠비셔스" -영숙이에게
'네가 이 편지를 받아볼 때 쯤이면 나는 부산항을 출발해서 배를 타고 남지나해의 푸른 파도를 보고 있을 것 같다. 라스팔마스는 우리나라 원양어선 전진기지가 있는 곳이다. 나는 간다.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해서 나는 간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사기를 쳐서 미안하다고 전해다오.
영숙아 너에게 마지막으로 솔직히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너는 내게 있어서 마지막 결혼사업 대상이었다. 노래방 가사처럼 한마디 하겠다. 나는 너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너에게 돈을 뜯어 저 남쪽 끝 제주도에서 따뜻한 겨울을 지내보려고 마음 먹었으나, 아예 그럴 바에는 국제적으로 크게 한 번 놀아보자는 생각 때문에 국제적인 제비가 되기 위해 제비의 길을 떠난다.
그 이름도 근사한 라스팔마스, 남편들은 배타고 나가고 없고 돈 많고 늘씬한 스페인 여자들이 득실대는 곳. 나는 라스팔마스로 간다.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그런 것은 순 거짓말. 한 조각 양심 때문에 고백하고 떠난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먹고 잘 살라고 전해다오. 너도 시집가서 애 낳고 잘 살아라. 보이스 비 앰비셔스. 나를 찾지 말아다오. 나는 배타고 라스팔마스로 간다.'
-홍식이가
■그때 한국일보에는/"중년층 이상서 폭발적 인기"
1994년 1월부터 10월까지 방영된 MBC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은 방송 3개월 만에 시청률 1위에 오르며 화제를 낳았다. 한석규 최민식은 이 드라마로 톱스타 반열에 올랐고, '전원일기' 김 회장 댁 점잖은 큰아들 김용건은 퇴물 춤선생 박씨로 나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 해 3월25일자 한국일보. "MBC 주말 연속극 '서울의 달'은 찢어지게 가난한 군상들의 얘기로 중년층 이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서울의 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름하고 작은 것으로 다툰다." 없어서 작은 것에 더 집착하는 군상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달동네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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