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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진의 방송보기]리얼리티 프로 홍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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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진의 방송보기]리얼리티 프로 홍수시대

입력
2004.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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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들은 진실과 거짓 두 종류로 구분된다. 뉴스는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을 진실되게 보여주는 작업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어쨌든 뉴스의 목표는 진실을 향해 움직인다. 반면 드라마는 지어낸 거짓 이야기이다. 거짓이라는 형식을 통해 시청자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고자 애쓴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의 진실과 거짓은 서로의 경계를 슬그머니 넘나들기 시작했다. 뉴스와 다큐멘터리에서는 컴퓨터 그래픽과 자료화면을 이용하거나 종종 재연 장면을 끼워 넣어 그림을 만들기 시작했고,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스타의 하루를 '셀프 카메라'의 이름으로 보여주거나 역사적 사건을 재연하면서 '사실적 재미'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MBC '타임머신'이나 SBS '솔로몬의 선택'의 경우, 사실을 재연하되 철저하게 시청자와의 거리를 유지한다. 본질과 무관한 장면을 삽입하거나 과도한 희화화를 통해 뉴스나 다큐에서 보여주는 사실성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진다. 사실의 허구화이다. SBS '야심만만'이나 KBS2 '해피투게더' 같은 게임 토크 쇼에서는 출연진의 즉흥적인 행동을 포착하고 그 위에 "너무나 솔직한 그녀" 같은 자막을 얹음으로써 허구가 아닌 '사실'을 본다는 느낌을 준다. 끊임없이 현실 효과를 강조하는 허구와 지나치게 허구의 논리에 의존하는 현실이 공존하는 셈이다. 특히 KBS1 '체험 삶의 현장'처럼 텔레비전이 현실을 연출하고 그 내용을 중계하는 경우에 이르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마저 애매해진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케이블과 VCR의 위협에 직면했던 1980년대 미국의 방송사가 인력 및 경비의 절감과 사실적 재미의 배가를 이루기 위해 본격적으로 만들어낸 장르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 목표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달성되는 듯 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현실 인식에 혼란을 준다는 일부의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거의 모든 예능오락 프로그램에 이 기법을 활용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리얼리티 기법이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도 허구도 아닌, 그 사이의 텔레비전적 진실이다. 이 텔레비전적 진실을 아예 전제로 하는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영국 BBC가 작년에 만든 더 트렌치'(The Trench)는 리얼리티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훌륭한 역사물을 만든 한 예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전투를 재연한 이 작품은 연출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는 잘 만든 역사 드라마로 볼 수 있지만, 철저하게 '사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 다큐멘터리의 돌파구로 평가되기도 했다. 텔레비전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또 다른 방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새로운 장르나 기법의 무조건적이고 광범위한 적용 이전에, 이를 창조적으로 가공하고 활용하는 기획이 필요하다. 이것이 장르의 발전이고 방송의 발전이다. 비누 찍어내듯 속도전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하는 현재의 방송구조에서 창의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윤태진/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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