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그린다’는 것은 사실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밖을 돌아볼 것도 없이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나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그림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형태를 만들어 그려놓은 가장 단순한 것이다. 모더니즘과 추상의 물결에 밀려 우리 그림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그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서용선(53ㆍ서울대 교수)씨는 고집스럽게 그림으로 이야기하려는 화가의 한 사람이다.그가 이야기가 있는 그림들로 11일부터 일민미술관에서 ‘미래의 기억’ 전을 연다. 2m에서 5m가 넘는 대형화폭에 거칠고 천진난만한 듯한 붓질, 더없이 과감한 원색의 터치로 ‘전쟁’과 ‘신화’라는 두 가지 이야기를 그려냈다. 정영목 서울대교수에 따르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서용선 만큼 집요하고 무게 있게 역사화에 몰두한 화가는 없다.”
서씨는 1990년대 초반부터 단종애사와 동학혁명 이야기를 그려왔다. 80년대 후반부터는 풍요로움 속의 외로움, 군중 속의 고독에 침몰하는 도시인의 모습을 꾸준히 그려오고 있다. 폐광촌 그림인 ‘철암 프로젝트’도 그의 주요 작업이다. 과거의 사실이나 오늘의 현상 모두가 그의 ‘역사화’의 대상이 된다.
이번 전시의 두 가지 큰 주제 중 하나인 ‘전쟁’에서 그는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의 노근리 사건, 부역자의 모습, 피난민 행렬과 휴전선에서 대치 중인 남북한 병사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역사화가 현실을 비켜갈 리 없다. 바그다드의 모습과 미군 스텔스 기가 등장하는 ‘폭격’, 전쟁포로들의 모습을 그린 ‘사막의 밤’ 등은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전쟁을 그린 그림이다.
세부 묘사보다는 거친 듯 형태만을 그린 대형 화면에 잠시 숨을 멎게 만드는 듯한 강력한 붉은 색 등의 원색, 그림 속 주인공의 섬뜩하게 휑한 눈동자는 그의 그림이 뿜어내는 강렬한 주술적 힘, 그 자체다. 역사의식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는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계열과 같이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은 이처럼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또 다른 주제인 ‘신화’로 분류되는 그림들은 서씨가 2002년 5월부터 2003년 1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동양의 신화’ 시리즈 삽화로 그린 작품들이다.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 영웅 ‘예’와 곤륜산(昆侖山), 삼족오(三足烏), 하백(河伯), 항아(姮娥) 등 신화의 배경과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듯 생생한 필치로 재생시켰다.
전쟁과 신화라는 주제는 언뜻 상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서씨의 그림에서 이들은 이야기가 있는 그림 즉 서술적 회화라는 점, 과거 이미지의 새로운 창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는 잊혀진 이야기들을 복원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자를 치유하려 한다. 큐레이터 김희령씨는 “잊혀진 자를 위한 새로운 신화”라고 서씨의 그림을 말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전시 제목처럼 다시 ‘미래의 기억’이 된다. 전시는 7월18일까지. (02)2020-2055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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