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징용된 수천명의 조선인이 중국 하이난(海南)섬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집단 살해 당한 '해남도 학살사건'의 생존자가 나타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태평양전쟁유족회(회장 양순임)는 자체 조사결과 인천에 사는 고복남(87)씨가 중국 하이난섬에 강제 연행됐다가 집단학살이 자행되기 직전 현지를 탈출한 생존자로 확인됐다고 9일 밝혔다.
유족회는 "고씨가 사건 직후 현지에서 집단학살 사실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고 얘기했는데 모든 내용이 지금까지 유족회가 입수한 자료들과 일치한다"며 "그가 말한 내용 가운데는 당시 하이난섬에서 강제노역을 하지 않았다면 접하기 힘든 정보들이 포함돼 있어 최종적으로 실제 피해자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간 한일 양국의 학자 및 시민단체들에 의해 하이난섬 사건에 대한 각종 증거자료 등이 제시된 적은 있지만 실제 생존자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끔찍했던 하이난섬의 기억을 낱낱이 토해냈다. 1943년 5월 상해죄로 2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고씨는 잔여형기를 면제해 준다는 간수들의 말에 따라 평양·서대문·대전형무소의 재소자 800여명과 함께 '남방파견 조선보국대'라는 완장을 차고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하이난섬 강운이란 마을에 도착한 뒤 고씨 일행은 지하 격납고 건설에 동원됐다. 매일 10시간 이상의 가혹한 중노동과 모진 고문 및 폭행에 시달리던 고씨 일행의 몸과 마음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밤마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이 감행됐으며, 44년 가을에는 마침내 고씨도 탈출 대열에 끼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건설 현장으로 되돌아 왔다. 고씨는 "징벌방이란 곳에서 공중에 매달린 채 매를 맞았다. 죽어나간 조선인들이 결박도 풀리지 않은 상태로 매장됐다"며 몸서리를 쳤다.
이후 고씨는 일본군에 의해 숨진 동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하다가 학살 직전인 45년 초여름 극적으로 탈출해 인근 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45년 8월 조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씨는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공사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은 격리돼 있던 50여명의 환자들 뿐이었다. 환자들과 조선인 간수, 현지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비행장과 인근의 세키로쿠(石碌) 광산 등에서 조선보국대를 마구 총살했다"고 말해주었다. 고씨는 이후 45년 11월 귀국해 군 정보기관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직후 제대, 목수로 살고 있다.
고씨는 "가족들에게 전과자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려 했지만 일본군의 만행을 밝혀야 되겠다는 생각에 유족회에 연락을 취했다"며 "강제연행 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우리 정부가 조속히 진상규명과 생존자에 대한 배상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난섬 조선인 학살문제를 연구해 온 재일사학자 김정미(55)씨는 "고씨의 증언은 일본 내 생존 중인 수십여명의 가해자들이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에서 사건의 참상을 확인해 준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원도 "고씨가 증언한 연행시기와 장소, 인원 등 대부분의 정황이 일제 총독부의 관련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족회는 고씨의 증언을 토대로 하이난섬 현지 추가조사를 계획 중이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 하이난섬 학살은
1943년부터 일본이 중국 최남단인 하이난섬에 조선인 재소자 2,000여명을 조선보국대(朝鮮報國隊)란 이름으로 끌고 가 비행장 건설과 항만·철도공사, 철광 채굴 등에 동원한 뒤 패전과 함께 철수하면서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대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이 사건에 대해 시인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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