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50년은 굴곡 많았던 우리 현대사의 50년과 궤를 같이 해 왔다. 그동안 한국일보는 사시(社是)에 적시한대로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정정당당하고 불편부당하게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독재권력에 굴복해서 진실을 알리고 기록해야 할 임무를 저버렸던 때도 적지 않았다. 왜곡 과장 보도도 많았고 오보도 있었다. 특히 격동의 시기였던 1979∼80년 한국일보의 지면에는 굴종과 치욕의 과거가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아 있다. 창간 50주년을 맞아 이 참담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다시는 그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한국일보의 각오이자 새 출발의 다짐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이후 급변하던 정국. 12월 8일 암울한 유신 말기를 상징했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됐다. 한국일보는 9일자 사설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비록 긴급조치 9호 하의 엄중한 제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언론 본연의 사명에 비추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했음을…참회하고…오늘의 깊은 반성을 반드시 전향적인 분발에 연결시킬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 결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진 12·12 군부 쿠데타와 군부의 정권장악. 펜은 결코 칼보다 강하지 않았다. 한국일보는 국민들에게 사태의 진상을 전혀 알리지 못했다.
이듬해인 80년 봄 전국 학원가에서 들불처럼 번진 민주화 요구 시위. 한국일보는 "시민들은 과격학생 시위가 몰고 올 사회혼란과 경제마비를 한결같이 걱정"(5월 15일자), "수십만 시민 짜증의 귀가길"(5월 16일자) 등의 보도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기에 이른다.
외면과 왜곡의 절정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광주 사태는 22일자에야 겨우 정부 발표를 통해 처음으로 보도된다. "광주지역 소요가 극심한 난동현상을 보이는 원인은…학원 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 데 기인한다."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들을 유혈진압한 사실을 전한 28일자에는 "계엄군 투입과정에서 무장 폭도 17명 사망"이라는 계엄사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이날 사설은 이랬다.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치안회복이 시급한 명제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렇게, 광주 시민은 두 번 죽었다.
6월 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자문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의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마침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한국일보는 다시한번 굴종한다.
6월 3일자 사설은 국보위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의 기능 및 역할을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다하려는 의지의 표명…그러므로 (국보위는) 국정전반의 최고협의체 같은 성격을 띠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정상적 정치기구인 국보위를 국정 최고기관으로 인정해주었다.
8월 5일 한국일보는 이른바 삼청교육대의 출발을 "정의의 새 시대를 기약―사회악 일소 조치 시원하게 협력하자"라고 보도했다. 순화교육의 문제점이나 부작용에 대한 우려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정치활동 중지(5월 18일) 이전까지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진행돼 온 개헌안 논의가 8월 들어 '선거인단 간선제'로 급선회했다. 3일자 한국일보는 "간선제가 국론분열과 안보 저해를 막을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상황을 볼 때도 직선·간선 중 어느 것이 더 민주적이냐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론이 없다"는 논리를 제공,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망에 비수를 꽂았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17일)하기 전부터 노골적인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한국일보는 전두환 장군이 전역한 소식을 23일자로 전하며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의 통솔력은 기술 아닌 지극한 정성. 육사 시절 첫 축구팀 창설 명 골키퍼로. 예리한 판단력 무서운 추진력. '구국의 길을 뚫을 수 있다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다'" 등의 극찬에서 '전두환 장군 어록'까지. 흡사 북한의 지도자 찬양을 연상시키는, '용비어천가'에 다름 아니었다.
8월 27일 체육관 투표에서 전두환 11대 대통령이 당선됐다. 이를 전한 28일자 사설은 이랬다. "2,524표 중 2,524표로…만장일치에 가까운 절대다수 지지표를 통해 민의의 집중적 표현을 공식화…11대 대통령 임기는 간단히 '과도적'으로 속단할 바 아니다. 전 대통령의 국정지도이념은…단시일 내 구현될 바 아닌 데다가 내외난제 중첩기에 '영도자의 공백'이란 있을 수 없다." 이듬해 있을 개헌 후 선거에서 전두환이 12대 대통령까지 맡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어 9월 1일 취임식을 전한 한국일보 2일자는 "청명한 가을볕도 새 시대 축복"이라고 적었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