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놓고 말들이 많다. 신문의 위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정작 신문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깊지 않은 듯하다. 신문이란 과연 무엇이며 이 시대에 신문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은 왜 신문을 읽는가 등을 먼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서는 신문을 둘러싼 어떤 논의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창간 50주년을 맞아 5회에 걸쳐 종이 신문의 본질과 정체성, 과거, 현재, 미래를 총체적으로 짚어 본다.
나는 일요일이 싫다. 다음날이 월요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문이 없어서 그렇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걸린 듯한 신문중독은 30년을 지나며 더욱 기승을 부리는 느낌이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텔레비전 시대고 인터넷 세상인데, 이 무슨 시대착오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러한 나의 고민은 월터 크론카이트의 말 한마디로 깨끗이 사라진다. "신문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별 있는 민주시민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되풀이할 필요 없이, 크론카이트는 전설적인 텔레비전 뉴스 앵커다. 그러나 그는 자서전과 인터뷰 등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신문읽기를 강조했다. KBS 다큐멘터리를 위해 2001년 가을 그를 만났을 때 내게도 같은 말을 했다. "30분짜리 TV뉴스는 신문에 옮겨 놓으면 1면의 절반 정도를 채우는데 그칠 겁니다. 이 정도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났구나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신문은 TV 저녁뉴스의 몇 십 배 뉴스를 전합니다. 그것도 깊이와 맥락까지 곁들여서."
1950년대 중반까지 뉴욕 타임스 발행인이었던 아서 설즈버거는 자신들이 만드는 신문은 매일 백만 단어 분량의 기사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1,000여 명의 편집국 인력이 기사를 쓰고 고치는 작업에 매달린다고 했다. 이미 50년이 지난 얘기지만, 신문의 신문이라는 뉴욕 타임스가 보유한 인력 수준과 정보의 양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발언이다.
돌이켜보면, 서양 신문의 역사는 300년을 뛰어넘는다. 현대적 모습의 신문만 고려해도 200년에 다가간다. 서양의 산업사회는 신문의 역사와 그 궤적을 함께 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컬럼비아대의 저명한 언론학자인 제임스 캐리 교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다양한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단일국가국민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계기는 19세기 중반 페니 프레스라 불리는 일센트짜리 대중신문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주장한다.
샌디에이고대의 마이클 슈츤 교수도 비슷한 생각을 제시한다. "신문을 읽는 행위는 공동체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신문에 실린 여러 가지 기사를 동시에 읽는 행위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가장 기초단계이다. 그러나 슈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신문읽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권력을 가졌거나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압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독자는 혼자서 조용히 기사를 읽지만, 그러한 행동들이 모여 사회적 토론이 만들어 지고, 국민적 합의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언론학자들은 뉴스를 공공의 지식(the Public Knowledge)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공공의 지식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많은 사람이 소비한다는 뜻이고, 다른 한 측면은 함께 소유하는, 공유하는 지식이란 뜻이다. 이렇게 보면 신문은 엄청난 지식산업이다. 한국 신문들은 하루에 적어도 200개 이상의 기사를 게재한다. 연구나 교육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신문에서 얻는 정보가 자신이 습득하는 지식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신문뉴스가 대부분 시민들의 유일한 지식공급원인 셈이다.
되짚어 보면, 20세기는 끊임없이 새로운 미디어들이 신문의 입지에 도전장을 내민 매체 투쟁의 세기였다. 1920년대 라디오의 등장은 매체 간 경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텔레비전이 1950년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신문은 주도권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인터넷 매체 시대의 개막은 종이신문의 종언을 예고했다.
과연 300년 신문의 역사는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안타까운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신문의 정기독자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문이 산업의 한 분야로서 독자기반을 확장시키기는 어렵다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신문의 가치는 계속 유지될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첫째는 자유로움이다. 신문은 읽는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다. 어디든 들고 갈 수 있고 어떻게든 접을 수도 있다. 오려두기와 복사하기를 통해 특정 분야에 대한 체계적 지식의 축적도 가능하다. 신문이 주는 또 다른 자유는 기사 선택의 무작위 접근성이다.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로 불리는 이 특성으로 인해 독자는 순서에 관계없이 원하는 지면의 원하는 기사로 언제나 직행이 가능하다.
두 번째 강점은 우연한 만남의 즐거움이다. 인터넷이 위세를 떨치며, 많은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이트를 방문하거나 즐겨보는 뉴스만을 읽는 습관에 길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관심 분야가 아니면 뉴스를 접할 기회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신문은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광고와 부고까지 온갖 일들을 한 공간에 모아 전달하는 백화점식 성격을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뜻밖의 뉴스나 생각지 못한 사람과의 만남은 신문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구조화된 우연이다. 인터넷 세상에서 끼리끼리의 모임이 성행할수록 신문이 제공하는 우연한 만남의 즐거움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으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신문의 가장 강력한 매력은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인인 벤자민 브래들리가 말했듯이 방대한 정보가 담긴 신문을 기적처럼 매일 아침 독자들의 문 앞에 까지 배달하는 능력이다. 텔레비전 뉴스나 인터넷 서비스는 아직 신문만큼 많은 정보를, 신문 수준으로 가공하고 판단을 가미해, 그 정도의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전달할 능력이 없다. CIA 같은 정보기관은 아마도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겠지만, 신문처럼 당당하게 공공의 지식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하물며 정보 하나에 2원 수준의 가격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언론에 대한 논란이 계속된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좋은 기사를 싣는 신문만이 미래를 차지한다고 믿는다.
이재경 이화여대 언론홍보 영상학부 교수
■신문 보는 이유 "세상일 알기위해" 41%
신문(新聞)은 더 이상 새 소식을 뜻하지 않는다. TV에 이어 최근에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이름과는 반대로 가장 구문(舊聞)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신문을 읽는다.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 이유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자료는 한국언론재단이 2년마다 실시하는 언론수용자 의식조사다. 가장 최근인 2002년 조사에서는 전국 18∼65세 미만 성인남녀 1,255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가 41.2%로 가장 높았고 '생활정보나 상식을 얻기 위해'가 24.1%로 그 다음이었다. 반면 TV는 '세상 일을 알기 위해'(29.5%)와 '흥미, 오락, 휴식 등을 위해'(27.3%), 인터넷은 '필요한 전문 지식·정보를 얻기 위해'(27.7%) '흥미, 오락, 휴식 등을 위해'(26.1%)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신문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알아야 할 정보를 전해주는 매체로서의 역할이 가장 큰 셈이다. 기사 유형별 열독률에서 사건, 사고 기사가 2.85점으로 가장 높게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신문들은 독자들이 신문을 보는 이유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신문을 믿지 못하겠다는 독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신문에 대한 신뢰도는 '보통이다' 43.4%, '어느 정도 신뢰한다' 18.9%,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13.18%로 보통 이하가 80%에 육박했다.
특히 매체별 신뢰도는 1992년까지는 신문이 TV를 앞섰으나 이후 역전되기 시작해 2002년 조사에서는 신문 19.9%, TV 48.4%로 격차가 상당했다. 인터넷의 신뢰도는 8.5%로 낮았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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