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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레이건 前 美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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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레이건 前 美대통령

입력
2004.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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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공화당 시대를 열고 세계의 냉전을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레이건은 1930년대 뉴딜 시대 이후 이어져오던 수요중시 경제정책, 복지정책 강화, 동맹중시 외교 등 기존 패러다임을 허물고 지금까지 지속돼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힘을 통한 세계 지배라는 새 얼개를 짰다는 평가를 받는다.

레이건은 '악의 제국' 소련을 무너뜨렸지만 자본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미국의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선과 악을 두부 자르듯 잘랐던 자신의 세계관이 후계자들에게 미친 영향으로 냉전 후에도 여전히 갈등하는 세계를 목격해야 했다.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

미국인들은 30년대 대공황, 50년대 매카시 선풍, 60년대 이후 흔들리는 미 대통령 리더십의 시기를 관통해온 레이건을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여긴다. 워싱턴포스트는 "레이건은 아메리칸 드림을 판 이들 중 단연 챔피언"이라고 평가했다.

일리노이주 시골에서 구두 세일즈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레이건은 가난 속에서도 대학 학생회장 등을 맡으며 정치가의 야망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라디오 방송 스포츠 아나운서를 잠시 하다가 37년 '사랑은 방송 중'에 출연, 할리우드 영화배우로 데뷔한다. 그는 64년까지 59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B급'배우에 머물렀다. 하지만 정치판에서는 달랐다. 그는 영화배우조합(SAG) 회장을 연임하면서 매카시선풍에 편승,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첫 부인 제인 와이먼과 이혼 후 자신의 이름을 할리우드 공산주의자 명단에서 빼달라고 부탁한 낸시 데이비스(낸시 레이건)와 만나 결혼한다.

그는 67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에 취임, 주 재정적자 문제를 풀어내면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급기야 81년 역대 최고령인 70세에 40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낙천성과 명연설

레이건은 대통령 재직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고 그의 아젠다는 여전히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감세, 반 규제, 친 경영 철학으로 요약되는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90년대 호황의 기초를 닦았다. 대처리즘 등과 맞물려 탄생한 레이거노믹스는 신자유주의의 풍미로 이어진다.

레이건은 극단적 반공주의에 기초해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을 내걸어 경제난에 허덕이던 소련을 무기경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중거리 핵 폐기 조약을 체결, 소련의 내파를 유도하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그는 명 연설가다. 미국인들은 라디오와 TV가 없던 시대의 링컨, 노변담화를 통해 라디오 시대를 이끈 플랭클린 루즈벨트, 준수한 외모와 명쾌한 화법으로 TV연설의 새 장을 연 레이건을 3대 웅변가로 꼽는다. 그는 항상 유머를 잃지 않았고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얘기해 아버지 같은 대통령상을 심었다. 81년 저격당한 후 태연히 "피하는 것을 잊었어"라는 농담을 건넸고 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했을 때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희망과 여정은 지속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남긴 것

미 정치학자들은 그를 1960년대 이후 암살(케네디) 베트남전(존슨) 워터게이트사건(닉슨) 등 오욕으로 얼룩진 대통령 위상을 복원시키고 보수주의 혁명을 통해 1930년 이후 지속돼온 민주당 독주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로 평가한다.

텍사스대학 루이스 굴드교수는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을 결합시킨 그는 이제 공화당의 부적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감세정책으로 대표되는 레이건주의에서 이탈하려다 재선에 실패한 선례를 목격한 현 부시대통령이 보수주의 본령에 집착하는 것도 레이건이 남긴 그림자다.

레이건 시대는 현재 진행형이다. 레이건 시대에 자란 공화당원들은 의회와 대법원을 장악하고 있고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신보수주의자들은 세계전략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52년간 옆자리서 한결같이… 낸시, 영원한 반려자

52년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옆 자리를 지켜온 부인 낸시 레이건(82) 여사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할리우드 배우로 활동하던 52년 이혼남인 레이건과 결혼한 낸시 여사의 초기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남편이 캘리포니아주 주지사로 있을 때 낸시는 후원자인 백만장자들과 어울리고 고가 의류 등을 사들여 구설수에 올랐다. 대통령 영부인 때에는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와 밀애를 즐기고 점성술사의 점괘에 따라 대통령 일정을 조정한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낸시는 갈피를 못 잡는 남편에게 야무진 조언을 해왔다. 남편이 옛 소련과의 군비감축 협상을 밀어붙일지 여부를 고민할 때 낸시의 격려는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CNN은 "낸시가 없었다면 레이건 전 대통령은 할리우드의 일개 배우로 생애를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평했다.

낸시는 백악관을 떠나 1994년 남편이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후 남편을 헌신적으로 지키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낸시 여사는 2001년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게 슬프다"고 안타까워했고, 남편 병세가 악화한 최근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며 절망했다. /이영섭기자

■각국 지도자 애도 잇달아

5일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영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로부터 그를 기억하고 평가하는 헌사가 이어졌다.

1980년대 고인과 굳건한 영―미 동맹을 구축했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그는 진정 위대한 미국의 영웅이었다"고 회고했다. 대처 전 총리는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정치적 친구"라며 "그의 정책으로 지금 자유를 누리는 수 백 만 명이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냉전 종식의 파트너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나에게 레이건은 위대한 대통령"이라며 "극우파로 간주되는 레이건은 우리를 향해 다가왔고 이곳에 그의 신망을 남겼다"고 애도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공산주의와의 냉전에서 자유주의 승리를 이끈 대통령"이라고 추모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재임 시절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돈독한 신뢰 관계로 '론―야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그는 영국의 좋은 친구였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은 1987년 레이건 전 대통령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베를린 장벽을 허물라'고 촉구한 연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우리는 레이건의 옛 공산국가 지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등 옛 동구 지도자들은 레이건의 냉전종식 노력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레이건이 리비아 공습에 대한 재판을 받지 않고 사망한데 대해 유감을 표했고 동티모르 인권단체는 "레이건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외신=종합

■美전역 애도의 물결

5일 오후 (동부시간) 미국은 강력한 지도력과 낙관론을 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전국적으로 추모의 분위기에 빠졌다.

백악관을 비롯 전국 곳곳의 국기 게양대에는 즉각 조기가 걸리고 그의 시신이 안치될 캘리포니아주 시미 밸리의 레이건 도서관을 비롯 그의 자취가 묻어 있는 곳에는 조화 행렬이 이어졌다.

파리를 방문 중인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미국 TV로 생중계된 메시지를 통해 "위대한 미국의 한 삶이 오늘 끝을 맺었다"이라며 "그의 지도력 아래에서 전세계는 두려움과 독재의 시기에 종말을 고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존 케리 상원의원을 비롯 정치인들은 당파를 초월해 애도의 뜻을 표했고 보통 시민들도 그의 행적과 유머,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와 알츠하이머 병의 고통을 되새기며 헌사를 잊지 않았다.

케리 의원은 즉각 성명을 내고 "그는 민주당원들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할 때도 미소를 머금었다"며 "이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후 5시면 우리가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아니라 모두 미국인이며 친구라는 고귀한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나와 힐러리는 미국인의 낙관론을 체현한 그를 언제나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미국의 방송들은 긴급 프로그램을 편성, 레이건의 일대기를 조명하고 그의 사망 소식 장례 일정, 국내외 반응을 속보로 전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레이건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며 장례 일정은 6일 중 확정될 것이라고 전했다.

레이건의 시신은 사망 4시간 뒤 로스앤젤레스 인근 한 영안실로 옮겨졌으며 시미 밸리 레이건 도서관에 24시간 안치된 뒤 포인트 무구 해군기지에서 비행기로 워싱턴으로 운구된다. 워싱턴에서는 24시간 국회 의사당 원형건물에 안치된다. 워싱턴 도착 후 3일째 내셔널 대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되고 장례식 후 시신은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레이건 도서관 언덕에 묻히게 된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 한국과의 관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81년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국빈 초청한 외국 정상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81년 2월 백악관에서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4만 명 수준이던 주한 미군 철수 백지화를 약속했다. 이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인권 외교로 위기에 놓였던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을 재확인 한 것으로 레이건의 한―미―일 동북아 반 공산주의 블록 강화 구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정상회담은 79년 12·12 쿠데타와 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을 통해 집권한 5공화국 정부를 공식 지지한 것이라는 강한 비난을 받았고, 이후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잉태되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상황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정통성 위기에 흔들리는 5공화국 정권을 지지해 주는 대신 김 전 대통령을 구명하는 거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대 한국정책은 인권이나 민주화보다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냉전적 사고의 틀 속에 있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과 이후 3차례 더 정상회담을 가지며 5공 정권을 적극 후원했다. 물론 이 같은 독재 정권 지지가 역설적으로 80년대 초반 경제 위기 극복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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