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지음·그린비 발행
나는 움직이는 교통수단 안에서는 책을 읽지 못한다. 출근하면서 공짜신문이라도 받아든 날엔 애써 활자에 시선을 고정해 보지만 이내 속이 울렁거리고 불편해진다. 그래서 대신 다른 놀이를 한다. 옆 사람이 든 책을 힐끔거리거나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이 펼쳐든 신문에서 오늘의 헤드라인을 챙기는 따위다. 훔쳐읽기 놀이는 자연스레 추리게임으로 이어진다. 책만큼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단서도 드물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일명 '철굴')은 대학생 또는 새내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나 역시 그 무렵 학교 앞 서점과 어색한 새내기 세미나 자리에서 이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면 철학을 한번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는 지극히 인문학도다운 포부와 원전 읽기란 아직 내 내공에 당치도 않다는 주제파악이 맞물려서 이 책에 손이 닿았던 것 같다.
저자 이진경은 '연구공간 너머+ 수유연구실'이란 독특한 연구집단에서 '근대성'을 화두로 집요하게 읽고 토론하고 쓰는 일에 푹 빠져 지내는 사회학자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도 역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동안 서양철학의 주제들이 '이성'의 맥락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데카르트에서 푸코까지 서양 철학사의 줄기를 짚어준다.
사실 철학서를 읽을 때 제일 당혹스러운 건 끝없이 쏟아지는 개념어와 생경한 이론에 끌려 다니다 지쳐버리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서론에 명쾌하게 씌어 있듯 철학의 출발은 의심이고, 철학의 역사는 기존의 사상을 뛰어넘으려는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튀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저자는 독자들이 그 화려한 개념들에 매몰되지 않도록 철학사 안에 그어진 경계를 찾아내어 거기에 새겨진 의미를 읽고, 그 의미 차이로써 철학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강의식 구어체로 된 입문서라곤 하지만, 어떤 문어체 서술보다 논리의 그물이 촘촘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8년 만에 나온 개정판은 어색한 삽화 대신 텍스트만큼 힘있는 그림과 정교한 캡션을 달고 세련된 변신에도 성공했다. 인문·역사서를 만들다 보니 학문적 엄정성과 대중적 교감 사이에서, '쉽다'와 '어렵다'의 경계에서 항상 고심하게 된다.'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내게 딱딱한 서양철학의 알 속으로 만든 말랑말랑한 애피타이저였지만, 지금은 직업적 고민을 음미하게 하는 디저트가 되었다. /유인정·푸른역사 편집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