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군경 부문 송기성씨송기성(宋基成·62)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강철인간으로 통한다. 몸이 불편하고 위기도 많았지만 단단한 강철처럼 이겨나간 그의 모습에 잘 맞는 별명이다. 1962년 2월 해군에 입대한 그는 함대 제19함에 배속돼 복무 중이던 63년 11월15일 서해안에 침투한 간첩선과 교전 중 오른쪽 다리에 파편상을 입었다. 진해 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한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진해 해군사격장 교관을 거쳐 66년 12월 베트남전에 참전, 2년간 백구부대 808함에서 근무했다.
제대 후 그가 힘쓴 것은 지역언론 발전. 그는 72년 군산 서해방송국 군산 분실에서 근무한 데 이어 82년부터는 전라일보 초대 김제지사장으로 일하며 지역언론 육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2001년 5월부터는 상이군경회 김제시지회장을 맡아 회원들의 복지와 지위 향상에 앞장섰다. 김제시지회는 6월부터 지회 상조회를 조직하는 한편 회원들이 매월 17일 김제시민운동장 충혼탑 군경묘지 등에서 청소와 환경보호활동을 벌여 2003년 전북 최우수 지회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1년 7월에는 사재 1,100만원을 털어 상이군경 회원들을 위한 보훈회관 회의실을 건립했고 2002년 12월에는 김제 군경묘지 정화사업에 600만원의 재산을 희사했다. 김제지역 국가유공자들의 숙원사업이 그의 힘으로 속속 실현된 것이다. 2002년 '국가와 보훈' 강사로 위촉된 송씨는 김제중앙중을 비롯한 3개 학교와 군 부대에서 특별강연을 실시하는 등 미래의 주역들에게 애국심을 불어넣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상이군경 부문 김구연씨
김구연(金九淵·59)씨는 1966년 갑종 간부후보생으로 임관, 베트남전에 소대장으로 파견돼 혁혁한 전과를 세운 영웅이다. 화랑 무공훈장을 받는 등 연일 전공을 올린 그는 그러나 68년 4월 맹호 10호 작전 중 적의 포탄에 양 대퇴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후 이듬해 5월 육군 중위로 명예 제대했다.
20대 초반에 불구가 된 그이지만 베트남전 영웅의 진가는 그 이후부터 더욱 빛이 나기 시작했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그는 자기발전은 물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메주 제조공장까지 설립했다. 이 같은 자립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진해시 자신의 동네에 마을회관과 노인당을 만들어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국가에 충성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이 군 부대 내에 위치해 시민들의 출입이 불편한 것을 알고 자치단체와 협의해 시내 풍호공원 내 대지 965평에 웅장한 충혼탑을 이전 건립했다. 그는 2차에 걸친 조경공사를 벌이는 한편, 향나무로 제작된 850위의 위패도 제작, 봉안했다.
신체상이 국가유공자의 고충을 해소하기 위해 목욕탕과 물리치료, 재활시설을 확충한 것도 그의 공로 중 하나.
자신의 땅 50평(시가 1억원)을 기증해 보훈회관 건립의 기초를 닦은 그는 자체적으로 마련한 기금과 지방보조금 각 3억5,000만원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보훈회관 겸 복지회관을 신축·이전해 국가유공자의 후생복지에 공헌했다. 또 그는 상이군경회 진해지회장을 3차례나 역임했다.
●중상이배우자 부문 육애화씨
육애화(陸愛花·50)씨는 1969년 10월 16일 부대 내 고압 전신주 수리 중 감전돼 왼쪽 팔 절단 등 중상을 입고 70년 6월 30일 명예 제대한 공상 군경 1급 김성영씨의 아내다. 불구자인 남편과 결혼해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 한편, 불굴의 의지로 자립에 성공, 이 시대의 귀감이 됐다.
며느리로서 그의 헌신은 이미 유명하다. 둘째 며느리이면서도 시어머니를 14년간 극진히 모시면서 7년간 병 수발을 한 공로로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여수동국민학교 학구단위노인회(84년) 및 여수시장(85년)으로부터 효부상을 수상했다.
그의 결혼담은 마치 드라마 같다. 두 사람의 결혼은 72년 1월 MBC 라디오 프로그램 '절망은 없다'를 통해 전국에 소개된 김씨의 이야기를 듣고 육씨가 위로 편지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육씨는 '남편의 잃어버린 팔과 손이 되겠다'는 각오로 청혼을 했으며, 부모 형제와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74년 11월 5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는 남편의 사업장인 호남사진관 운영을 보조하는 것은 물론, 수예점 보험모집인 미니슈퍼 등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또 여수제일교회 신도로서 불우이웃돕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육씨의 억척생활 덕분에 장남은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생, 차남은 아시아나항공 직원으로 훌륭히 성장했다. 막내아들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 공군학사장교 입대를 기다리고 있다.
●미망인 부문 서금옥씨
서금옥(徐今玉·79)씨는 1950년 8월 11일 경북 영천지구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고 윤용승 육군 대위의 미망인이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서씨는 학창시절(보흥여자중)에는 문학소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재원이었다. 17세가 되던 43년 이웃 마을에 사는 윤씨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광복 후 서울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됐다. 1947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소속 국군종합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입교,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임관 당시 남편의 모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서씨의 마음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군인의 아내로 새 출발을 한 당시는 서씨에게는 가장 행복한 때였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은 찰나와 같이 지나가버렸다. 24세 꽃 다운 나이에 남편을 국가에 바친 그는 막막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피란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부산 영주동 고지대를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양말 옷가지 등 생필품 행상을 했고, 이후 미용 기술을 배워 자립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억척스럽게 저축을 해 모은 돈은 그의 주머니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았다. 그는 영주초등학교에 재학중인 소년소녀가장에게 매월 5만원씩 장학금을 5년간 지원(연인원 40명 800만원)하고 무의탁노인, 처지가 같은 미망인 및 자녀, 보훈병원 환자 돕기에 발벗고 나섰다.
65년부터 7년간 미망인회 부산지부장, 94년부터 현재까지 미망인회 중앙회 이사 재임 중 그가 베푼 선행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특별보훈 부문 이강수씨
이강수(李康壽·72)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과감히 교복을 벗어 던졌다. 펜을 놓고 총을 든 그는 서부전선으로 북진, 압록강의 물까지 들이켰던 학도병 출신이다.
휴전 후에는 경남 김해 육군 공병학교 교관으로 많은 후배 장병들에게 공병기술을 전수, 국군의 기틀을 닦았다. 59년까지 9년간 복무하면서 그는 화랑 무공훈장과 2차례 공로표창을 받았다. 청주사범학교 출신인 그는 예편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제2의 나라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학교생활, 야간에는 문맹퇴치가 그에게 맡겨진 소임이었다. 64년부터 7년간 자기 집의 방 한칸을 교실로 개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향학의 꿈을 심어줬다. 모교인 음성군 무극초등학교에는 장학회를 설립해 후배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영원한 스승의 길을 걸었던 그는 유난히 상복도 많았다. 78년 대한교육연합회에서 선정한 모범 교원이 된 데 이어 반공학습자료 제작으로 충북도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이어 79년 모범공무원상, 80년 문교부장관 표창과 대한교육연합회장상, 82년 이념교육유공 표창, 85년 대한교육연합회장 표창, 86년 경향사도상, 89년과 90년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장 공로패 및 특별공로상, 92년 청주교육대학장 감사패 등을 잇따라 수상했다.
2001년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충북지부장으로 취임, 도비 5,000만원을 받아 청주시에 도지부 사무실을 마련한 것도 그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다.
● 심사평
한국일보사가 한국보훈대상을 제정한 지 올해로 31회째를 맞았다. 강산이 세번이나 변한 연륜은 그 이상의 깊이를 말해준다. 동시에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온몸을 던진 분들이 고령이 됐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지금 국내외 상황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우리의 안보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보훈가족의 마음 한켠에 착잡함과 섭섭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추천된 후보들의 나라사랑과 의로운 삶이 많은 국민들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하며 심사에 임했다.
한국보훈대상 선정 대상은 국가유공자 또는 그 유가족으로 국민의 호국·보훈의식을 높이고 애국정신을 선양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분야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묵묵히 봉사한 사람, 굳은 의지로 자립에 성공해 타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공적 우열비교가 어려울 경우는 국가보훈제도의 취지를 살려 희생도 및 공헌도가 큰 사람을 우선 선정했다. 상이군경 부문은 중상이자가, 미망인 부문은 전몰군경 미망인이, 중상이 배우자 부문은 상이등급이, 특별보훈 부문은 국가유공자 본인이 각각 우선된다는 원칙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같은 기준에 따라 국가보훈처와 보훈지청, 한국일보사에 접수된 5개 부문 후보 23명의 공적 서류를 일일이 점검하며 토론하는 등 엄정한 심사를 통해 만장일치로 수상자를 결정했다. 다만 유족유자녀 부문은 1명이 추천됐으나 다른 분야의 후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훈이 떨어져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고 대신 상이군경 부문 수상자를 2명으로 늘려 예년과 같이 모두 5명으로 결정했다.
수상자 여러분의 숭고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축하의 말씀을 올린다.
/채명신 심사위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