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거리에서 빨간색 버스가 눈에 띄었다. 색감이 강한 듯했지만, 디자인은 제법 세련된 느낌이었다. 문제는 버스 허리에 크게 쓴 영어 알파벳 R 이었다. 행선지로 미뤄 광역버스이기에 언뜻 외국인을 위한답시고 Region(지역)의 머리글자를 표기한 것인가 여겼다. 광역과는 거리가 있는 듯 했지만, 시내버스 약자는 뭘까를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 알파벳 표지가 논란이 됐다는 기사를 읽고서야, R이 Red의 약자라는 걸 알았다.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 우스웠지만, 다른 한편 난센스 퀴즈에 어이없이 당한 때처럼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이 R를 Red의 약자로 읽을 이가 얼마나 될까. 또 설령 그렇게 읽더라도, 실제 버스를 이용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이렇게 보면 한글문화연대 등 많은 시민이 이미 지적한 대로, 이 약자는 아무런 정보가치가 없다. 버스를 온통 빨갛게 칠해놓고서, 이게 빨강 버스라고 다시 표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R자만 달랑 써놓고 Red를 나타낸다면, 영어와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난 외국인도 실소할 법하다. 알파벳을 전혀 모르는 노인들까지 생각하면, 얼마나 쓸모없는 표지인지 분명해진다. 혹시 자녀의 조기영어교육에 극성인 부모는 반길지 모르나, 그 것도 난센스이기는 마찬가지다.
■ 서울시는 국제화 시대에 맞는 상징부호를 마련한 것이라며 그냥 밀고 갈 자세다. 이게 도무지 터무니 없다. 상징부호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사물이나 개념을 구체적 사물로 나타내는 사회적 약속이다. 대표적 예가 버스나 지하철 그림표지, 장애인 휠체어 표지 등이다. 여기에 비춰 굳이 기능별 부호를 표시하려면, 이를테면 운행방식을 알리는 약도 모양의 부호를 개발해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차라리 광역 간선 지선 순환 버스를 줄여 광 간 지 순 등의 한글 약자를 쓰는 게 시민들에게 도움될 것이다. 또 국제화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아예 제대로 된 영어로 기능을 표시하는 것이 낫다.
■ 이런 점을 모두 무시한 채 파란색 간선버스는 Blue 여서 B, 초록색 지선은 Green 이니 G, 노랑색 순환은 Yellow라고 Y 따위로 표시한 것은 공무원들끼리 일하는 데나 쓸모 있을 자기들만의 약속에 불과하다. 어쨌든 디자인은 좋지 않냐고 말할지 모르나, 고작 그 정도 효과를 위해 숱한 문제를 무릅쓰는 것은 시민의 상식과 권리를 비웃는 것이다. 행정의 원칙과 도리에 어긋나고, 스스로 내세운 국제화 시대의 기준과도 동떨어진다. 잘못을 바로잡는 길은 시민들이 이미 제시했다. 서울시가 무모한 고집을 부릴 까 걱정돼 되풀이했을 뿐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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