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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잃어버린 헌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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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잃어버린 헌법을 찾아서

입력
2004.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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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들의 글은 술술 읽히지 않는다. 판결문이나 공소장이나 변론서만 그런 게 아니다. 신문 칼럼도, 글이 왜 이리 껄끄럽담 하고 누가 썼는지를 살피면, 아니나 다르랴 필자가 법률가이기 십상이다.법률가들의 문장이 울퉁불퉁한 것이 꼭 전문성의 갑각(甲殼)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한국만의 사정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우리 법률가들은 모국어를 깔끔하게 쓰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조악한 한국어 문장의 표본실이라 할 법서를 읽으며 학문적·직업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물론 박원순 변호사나 돌아간 조영래 변호사 같은 이들은 가히 문장가라 이를 만하고, 탐미주의 문인들 뺨치는 화려체 스타일을 즐겨 구사하는 차병직 변호사 같은 예도 있긴 하지만, 매끄럽고 날씬한 한국어 문장을 쓰는 법률가가 흔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흔치 않은 법률가 가운데 한 사람이, 내가 보기엔, 한동대 법학부 교수로 있는 김두식 변호사다. 내가 김 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것은 문체가 단정해서만은 아니다. 그가 그 단정한 문장에 기득권자의 보수적 목소리를 실어왔다면, 그의 글을 굳이 찾아 읽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눈길이 자주 그의 글에 머무는 것은, 그가 자신의 단정한 문장을 소수자 인권 옹호의 무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 서울 남부지법 이정렬 판사가 내린 무죄 판결이 여론에 미묘한 무늬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즈음, 김 교수의 책 '헌법의 풍경'을 읽었다. 이 책에선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가 정면으로 다뤄지고 있지 않지만, 김 교수는 다른 자리에서 몇 차례 이를 옹호하는 견해를 편 바 있다.

'헌법의 풍경'은, 습니다체로 일관하는 문체 전략에서도 엿보이듯, 법조계 바깥 일반인들의 계몽을 겨냥해 쓰여졌다. 그 계몽은, 구체적으로, 한국 사회가 대한민국 헌법의 이념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 당하지 아니한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같은 우리 헌법의 위대한 언어들은, 더러 위헌성이 의심되는 하위 규범들에 치여, 더 흔하게는 수사·공소 주체의 편의를 위한 위헌·위법적 관행에 얹혀, 현실 속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헌법의 풍경'은 그런 사례들을 차근차근 살피며 그 '잃어버린 헌법'의 이념을 되살릴 길을 모색한다. 그 헌법 이념 가운데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기본적 인권인 듯하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세 챕터는 각각 톨레랑스, 말하지 않을 권리,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제재로 삼아 기본적 인권의 침해 양상을 꼼꼼히 따져보고 있다.

그 기본적 인권의 옹호가 사변의 틀에 갇히지 않고 제도의 모색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예컨대 대한법률구조공단을 법무부 산하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산하로 옮겨 차별 철폐를 능동적으로 실천할 손발을 인권위에 마련해주자는 제안은 이해당사자인 법무부도 대승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 저자가 '전문 싸움꾼'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이런 인권위 소속 변호사들의 끈질긴 차별철폐소송이 누적되며 새로운 입법 운동이 싹트고 시민의식이 무르익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계몽교양서'인 이 책에서 법률가들이 새로 얻을 수 있는 '전문 지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가들의 가장 큰 소명이 인권 옹호라면, 정작 이 책의 독자가 돼야 할 사람들은 법률가들, 특히 검사들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 침해의 가장 두드러진 주체는, 안타깝게도, 공익의 대표자 노릇을 너무 성실히 하려다 국가주의의 톱니바퀴가 되기 쉬운 검사들이기 때문이다. 그 검사들의 지휘·감독자인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부터 짬을 내 이 책을 읽어 보시라.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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