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무서워 제시야, 사랑해!"마침내 총을 꺼내 자살을 하려는 딸을 보며 엄마 델마가 겁에 잔뜩 질려 소리를 지른다.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대목이다. 델마 역의 윤소정(60)은 정말 딸 제시의 엄마 같고, 나아가 제시에게 어느덧 동화된 관객의 엄마 같다. 조금은 공주병이고 조금은 주책스럽지만, 속에는 퍼내도 퍼내도 또 고이는 사랑으로 가득한 엄마 말이다. 그런데 딸 제시가 정말 그의 딸, 오지혜(36)다. 모녀가 모녀를 연기하는 희귀한 경우다. 두 사람의 무대 위 만남은 오지혜의 데뷔작 '따라지의 향연' 이후 13년 만이다.
'잘 자요, 엄마'('night, Mother·마샤 노먼 작·심재찬 연출)는 김용림·윤석화(1987년), 박정자·연윤경(1990년), 손숙·정경순(1998년) 등 일급 연기자들이 짝을 이뤄 줄곧 무대에 올린 인기작이다. 자살하겠다는 딸과 이를 말리려는 엄마의 실랑이가 극의 전부이고, 두 배우가 퇴장 없이 모든 걸 해결해야 하지만 리듬감 있는 구성, 뒤로 갈수록 달아오르는 극의 온도가 만만치 않다.
실전 같은 연습을 숨가쁘게 마치자 마자 오지혜가 소파 위에 털썩 몸을 기댔다. "집에서도 매일 집안 일을 하는데 여기서도 집안 일을 하잖아. 다리 아파." 딸 제시는 자살을 계획한 뒤 엄마를 위해 극중 내내 집안을 정리한다. 나중에 혼자 남을 엄마를 위해 세탁기 쓰는 법, 슈퍼마켓에 주문하는 방법 따위도 메모로 남겨둔다. "지혜가 아주 어려서부터 서로 별 얘기를 다 해서 친구 같아. 궁금한 게 없어."
윤소정이 딸 옆에 앉아 덕담을 건네지만, 오지혜의 대꾸가 예상 밖이다. "자식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데, 모르시는 거 많아요." 오지혜는 말이 심했다 싶었는지 이내 진화작업에 나섰다. "어렸을 때부터 내게 하지 말라고 권위적으로 하신 적이 없어요. 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아마 델마도 윤소정처럼 딸을 대했다면, 이런 긴박한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델마가 간질을 앓는 딸 제시를 너무 안으로 싸고 돌면서 비극의 씨앗이 자란다. 델마는 딸 제시가 걱정이 돼 늘 "하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그럴수록 제시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자살은 처음으로 그녀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행위다.
수다쟁이 델마와 우울해 보이는 제시만큼이나 윤소정과 오지혜는 달라 보인다. 윤소정의 살짝 몸의 윤곽이 드러나는 원피스와 오지혜의 위 아래가 하나로 된 청바지인 오버올의 대비는 두 사람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옷을 입어도 태(態)가 나고, 가슴도 큰 엄마를 보며 콤플렉스에 시달렸죠. 난 여자로서 섹시한 게 없으니까. 엄마는 또 나 보고 못생겼다고 자주 그러고…" 오지혜가 투덜거리자 윤소정이 친구처럼 위로해준다. "너 이뻐."
오지혜는 엄마를 '캐스팅'한 이유를 '내가 좋아하는 배우여서'라고 했다. "나이 들면 하려고 스물 한 살 때부터 이 작품을 별렀죠. 실제 엄마랑 하는 이런 엄청난 특혜가 어딨어요. 프로포즈를 했더니 '못 됐다'고 하세요. 어떻게 매일 딸 죽어가는 걸 보게 하냐고." 윤소정은 담담한 어조로 딸의 재능을 인정했다. "오지혜, 잘 해요. 잘 못하면 하고 싶지도 않았을 거야." 4일부터 7월25일까지 동숭아트센터소극장 (02)762―0010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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