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디지털디스플레이 & 미디어사업본부를 이끌고 있는 우남균(55) 사장은 영업맨 출신으로는 최초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 신화의 이면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전자산업 후발주자로서 수출을 위해 세계 곳곳을 뛰어 다니고, 전자왕국 일본을 따라 잡기 위해 사활을 건 경쟁을 하며 뿌린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그가 LG전자에서 일하며 수출전선의 첨병으로, 다시 디지털 전쟁의 수장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걸어온 30년은 어쩌면 한국 전자업계의 성장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수출전사
1970년대는 수출이 최고의 지상 과제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수출입국을 기치로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외화획득에 발벗고 나섰고, 전자업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출 전사였다. 1974년 7월 금성사에 입사한 그는 통역장교로 일했던 경력 덕분에 수출과에 배치를 받았다.
그 시절 수출과는 인기 부서였지만 고작 20여명에 불과했다. 3,000여명이 뛰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거의 구멍가게 수준. 그곳에서 그는 외국 바이어를 공항에서부터 술자리로, 호텔로 모시고 다니며 접대를 했다.
그 시절의 그를 엿보게 하는 일화 한 토막. 외국 바이어 접대를 하다보니 매일 귀가가 늦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번번이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 오는 그를 보고 어느날 경찰이 이유를 물었다. "금성사에서 수출 담당으로 일하고 있습니다.(우 사장)" "그럼 가시오. 빨리 가서 자고 수출해야죠.(경찰)" 우 사장은 "그때는 파출소 경찰도 수출을 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우 사장은 그렇게 20여년 넘게 해외에서만 일했다. 78년 미국 법인에서는 영업담당자로 일했고, 90년대에는 유럽지역에 파견돼 유럽 여러 나라의 해외법인 창설작업의 '산파역'을 도맡아 했다. 오늘날 LG전자가 미국 시장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 76개의 법인을 거느리며 올 1·4분기에만 4조7,203억원의 수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우 사장 등 해외를 뛴 임직원들의 땀 덕분이었다. 우 사장은 "영업 전선의 최전방에서 몸으로 싸워보지 않으면 절박함을 모른다"며 "어쨌든 그런 노력 등이 쌓여 전자산업이 한국의 수출 대표 업종으로 자리잡은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디지털 수장
수출 전사 우남균은 2000년 멀티미디어사업본부장을 맡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디지털 전쟁의 수장으로 변신했다. 2001년부터 이름을 바꾼 디지털 디스플레이& 미디어사업본부의 주력제품은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TV를 비롯해 DVD 플레이어, 광스토리지 등 첨단 디지털 제품들이다.
광스토리지가 6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하고 DVD 플레이어도 세계 1위 제품의 위상을 갖추고 있는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제품은 PDP TV. 첨단 디지털 TV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데다 일본을 처음으로 넘어선 품목이기 때문이다.
58년 금성사로 출발해 전자분야 제품을 꾸준히 개발해온 LG전자는 98년 PDP를 처음으로 개발, 양산한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60인치 PDP TV를 내놓으며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이후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지난해 7월에는 71인치를 개발했고 10월에는 76인치를 내놓았다. 76인치 PDP를 만드는 과정에서 원판으로부터 42인치 패널 3장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3면취 공법을 개발해 제조공법상 발전기반도 마련했다.
우 사장은 "PDP, 액정표시장치(LCD) 등 첨단 디지털 제품 분야에서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는데다 일본도 새롭게 전열을 다지고 있어 조만간 한·중·일 업체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는 "내년 상반기에 PDP 4기 라인이 준공되면 PDP 생산 세계 1위에 오르게 될 것"이라며 "LG전자는 핵심 칩셋, 디스플레이 부품, 소프트웨어 등 디지털 TV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핵심기술을 갖고 있어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LG전자는 디지털 TV 시장의 성장을 발판으로 2005년 매출 500억달러를 달성하고 2010년에는 세계 3대 전자·정보통신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있다. 우 사장은 "제품 리더십에서는 어느 기업에도 기죽지 않는다"며 "세계 1위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정상에 설 날이 머지 않았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인생역정이 배어있는 "인생역전"
누구나 일생에 몇 차례 '특별한' 만남을 갖는다. 우남균 사장도 그런 경험을 했다. 무엇보다 그 만남에는 LG전자의 성장은 물론, 영업맨으로 시작해 최고경영자에 오른 우 사장의 인생역정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1974년 금성사에 입사한 25세의 청년 우남균은 수출2과에서 외국 바이어 접대가 주임무인 '가방모찌'로 일하다가 그 시절 미국을 대표하는 전자업체 제니스의 구매담당 임원 프레스턴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외국 바이어는 하늘처럼 여겨졌다. 더구나 제니스는 금성사 매출의 20배쯤 되는 거대 기업이었고, 금성사는 그런 제니스에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조그만 회사에 불과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쉽게 짐작이 간다. 프레스턴이 한국에 오면 수출부 전체에 비상이 걸렸을 정도. 우 사장은 "언젠가는 당신을 이기고 말 것"이라며 이를 악물었다고 회고한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완전히 뒤바뀐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쇠락의 길을 걷던 제니스는 파산직전까지 몰렸다. 반면 금성사는 LG전자로 거듭나고 비약적인 성장을 계속하다 마침내 제니스를 인수했다.
95년 제니스 이사회에서 우 사장은 그를 다시 만났다. 우 사장이 제니스 대주주인 LG전자를 대표하는 신분이었던 반면, 프레스턴은 이사회 멤버가 아니라 우 사장이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직위였다. 20여년 만에 완전히 상황이 바뀐 것. 이후 우 사장은 98년 LG전자 북미지역본부장으로 종업원이 2만명에 이르던 제니스에 180명의 핵심기술 인력만 남기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해 제니스가 알짜 회사로 거듭나도록 새 출발의 기틀을 마련했다. /박천호기자
■"회의때 말 안하면 나쁜사람"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서관 7층에 있는 우남균 사장의 집무실은 조금 독특하다. 전 직원이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도록 커튼 하나 없이 훤히 들여다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최고경영자(CEO)가 직원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참여경영'의 소신 때문이다.
우 사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발언을 하지 않는 참석자는 혼쭐이 난다. 회의 시간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지식만 받아가는 나쁜 사람'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 사장은 '참여 경영론'을 강조하며 회전초밥을 예로 든다. 회전판을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먹는 회전초밥처럼 직원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격의 없는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참여경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혼자 결정하는 것보다는 동료들끼리 파트너십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갈 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직원들끼리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해결 방안이 나오고 자연스럽게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외영업만 20년을 했기에 우 사장은 누구보다 세련된 매너와 어법을 자랑하는 전자업계의 '말짱'으로 통한다. 한 주제만으로도 몇 시간 동안 강의할 정도이고, 복잡한 디지털 용어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재주도 탁월하다.언젠가 "PDP TV는 전기료가 비싸서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누군가 걱정하자 "수백만원짜리 제품을 사면서 전기료 몇 만원을 걱정할 사람은 없다"고 반박한 것은 전자업계의 유명한 일화다.
회식자리에 폭탄주가 없는 것도 남다른 점. 대신 그는 소문난 와인 예찬론자다. 프랑스 근무 시절 모아둔 와인이 3,000병이 달했고, 귀국할 때 아끼는 것만 골라온 것이 수백병일 정도로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다. /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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