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은 아직은 한나라당 의원보다 전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이 더 어울려 보인다. 배일도 의원. 1987년 서울시 지하철노조를 만들어 초대위원장을 맡았고 9∼11대 위원장을 역임했다.80년대 말, 그는 민노총의 전신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으로 머리띠 질끈 동여맨 채 파업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전국 사업장에서 활화산처럼 솟구치던 파업투쟁 뒤엔 항상 그가 있었다. 민노당 단병호 의원은 당시 부의장이었다.
두번의 구속과 8년간의 해고자 신분을 거쳐 복직한 98년. 그는 머리띠를 풀었다. '합리적 노동운동가'로의 변신이었지만 비판자들은 '어용', '변절'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99년 노조위원장에 다시 선출된 그는 '무쟁의 교섭'을 선언, '파업철' 별명을 달고 다니던 서울지하철의 노선을 바꿔놓았다. '국적있는 노동운동'을 얘기하고 '공존'을 주장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아예 무파업을 선언, 과거 동지들의 격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한마디로 과거를 정리했다.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노동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해고자 신분으로 바라본 세상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노동운동을 계급 대립과 투쟁으로 규정한 것은 산업화의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만난 이들이 장기표 김지하씨 등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부대끼고 고민하면서 확립한 철학에 누가 뭐라든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당대의 노동자'임을 자부한다고도 했다. 지금도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무급휴직 상태의 지하철공사 노동자라고 그는 당당히 말한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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