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중앙의 귀족정치에 저항하는 지방권력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마침내 대권을 잡았다. 이방원은 각 지방에 할거하는 개혁세력들과 합종연횡을 탁월하게 전개하며 이성계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앙정치의 부패와 무능은 이들 지방권력의 투쟁력과 모험심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중앙권력을 쟁취한 이방원은 각 지방권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를 통해 조선은 왕조국가의 기틀을 다졌지만 지방의 다양성과 모험심은 영영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지방에 기반해서 성장했고 지방의 지지를 기반으로 일어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대선 승리 1년 만에 마침내 의회까지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역전의 드라마를 보며 나 역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시대정신과 역사의 무게에 경외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동의 뒤편에서 나는 점점 의구심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미 메이저가 된 마이너 출신 정치인들에게 이제 지방은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더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이다. 참여정부 1년 만에 분권과 균형발전은 점점 핵심 의제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고난도 전략인지, 진실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버린 것인지, 아니면 아예 시효를 다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중앙의 비대한 군살을 제거하여 지방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것은 오히려 서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고, 빈혈상태에 놓인 지방으로서는 복음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말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신행정수도 이전이 생색내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더욱 과감하게, 도전적으로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이 솔선수범해 지방으로 먼저 내려와야 한다.
두 번째는 분권의 과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른바 지방 분권 3대 입법의 국회 통과로 표상되는 법과 제도의 정비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무척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지방에는 각성이 없고 정부는 '선 보완 후 분권'같은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숨기지 않는다.
분권과 균형발전을 위해 정부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공무원들을 끊임없이 연찬시켜 최일선에서 실천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중앙정부는 사무와 재정, 인력운용을 지방에 과감하게 넘기면서 본연의 전략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세 번째 의구심은 이번 17대 총선 과정에서 생겨났다. 도대체 이 땅의 정치인들은 국회의원과 도지사, 시장·군수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 것인가. 2002년 지방선거와 이번 국회의원 선거의 공약과 정책은 놀랍도록 유사하거나 차별화되지 않았다.
모든 국회의원은 각자 자신이 대표하는 지방의 정치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4년마다 지자체의 공약과 정책을 그대로 베껴내기에 급급한 단견과 인식부재에서 벗어나 지방을 위한 지방에 의한 지방의 정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로마제국은 번성기를 구가할 때 중앙을 강화하기보다 지방에 힘을 분산시키면서 교통과 통신을 통해 네트워크를 발달시켰다. 미국의 신화도 철저하고 합리적인 분권의 정신과 제도에 바탕해 있다. 탄핵의 고통을 의지와 신념으로 극복한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과연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대로는 안된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진정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지방분권의 새로운 시스템을 정립할 수 있다.
/김완주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대표회장/전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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