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가장 큰 소명감을 가지고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해온 신사회공동선운동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됐다.대한적십자사와 여러 시민운동단체에 참여하면서 나는 우리가 21세기를 지혜롭게 준비하지 않으면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느꼈다. 지금과 같은 정신문화로는 정보화사회, 지구촌시대에 경이적으로 발달하고 있는 물질문명을 제대로 선용해 인류의 운명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유지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적 변혁과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국민의식이 양극화 또는 다원화되고 건전한 윤리의식이 대단히 취약해졌다. 그래서 세계화시대에 우리가 다 같이 지켜야 할 '공동선'을 추구하며 실천하는 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절실한 생각을 했다. 한모음회를 하면서 가까운 친구들과 이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
1994년 10월13일 프레스센터에서 발기인과 각계 인사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공동선연합) 창립대회를 갖고 정식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다. 고문으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강원룡(姜元龍) 목사, 구상(具常) 시인, 강영훈(姜英勳) 전 총리, 김태길(金泰吉) 교수, 안병욱(安秉煜) 교수, 월하(月下) 스님, 이강훈(李康勳) 광복회장, 최태섭(崔泰涉) 한국유리 회장, 이을호(李乙浩) 박사 등을 추대하고 강석규(姜錫圭) 호서대 총장, 김상하(金相廈) 대한상의 회장, 정근모(鄭根謨) 박사, 김정문(金正文) 김정문알로에 회장, 박선규(朴善圭) 한적 중앙위원, 백낙환(白樂晥) 인제대 총장, 송월주(宋月珠) 스님, 이동찬(李東燦) 경총 회장, 장치혁(張致赫) 고합그룹 회장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했다. 상임 공동대표에 내가 취임하고 김삼룡(金三龍) 원광대 총장, 김옥라(金玉羅) 전 걸스카우트 총재, 이수성(李壽成) 서울대 교수, 정근모 박사를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나는 인사말에서 "이 운동의 목적은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올바로 대비하고 적응해 나갈 새 사회의 기초가 되는 정신문화를 건설하며 시민윤리를 정착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펼치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 때 유력 신문들이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공동선연합의 발족을 전하며 상당한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창립 대회 전에 나는 여러 사람을 만나 이 일에 대해 상의했다. 하루는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 강영훈 전 총리 등 네다섯 분을 저녁에 초대하고 의견을 들었다. 강 전 총리는 "좋은 운동이니 열심히 해보라. 이런 운동을 하려면 재정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남 전 총리는 새마을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한꺼번에 많이 하려고 하면 안 되고, 집중해서 국민 생활에 실제 이해관계가 있는 몇 가지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정부가 밀어 주어야 된다"는 얘기를 했다. 그 후 내가 운동을 해보니 두 분의 말이 맞았다. 공동선운동이 너무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서 관념적이기 쉽고 실제 피부에 닿는 운동 프로그램이 부족했다는 것을 후에 느끼게 됐다.
공동선연합은 연지동 여전도회관에 사무실을 내고 운영위원회 위원장에는 정길생(鄭吉生) 건국대 교수를 임명하고 박용준(朴龍俊) 본부장과 조성두(趙成斗) 사무국장 밑에 젊은 일꾼 4,5명을 배치했다. 나도 날마다 정식 출근하며 이 운동에 열성을 기울였다.
우선 중요한 사업으로 이 운동을 이끌 리더들을 기르기 위해 지도자 연수를, 취지를 국민에게 알려 동참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시작했다. 또 다음 달에는 이 운동에 찬동하는 각계 원로들의 간담회를 개최했고, 운동의 목표와 실천강령을 밝혀 뜻 있는 국민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각 신문을 통해 발표했다. 그때 제시한 운동강령은 인간의 존엄성회복, 생명질서존중과 자연보호, 가정윤리 회복과 자녀 바른 교육, 전인성과 전문성을 바로 기르는 교육, 종교와 신앙인의 공동선 윤리 실천, 건강한 도덕적 신사회 실현, 정의로운 민주시민사회 건설, 평화적 남북통일과 민족의 부흥발전 추구 등이었다. 이 호소문에는 김 추기경 등 각계 인사 130여명이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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