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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매혈기/극단 미추 연습현장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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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매혈기/극단 미추 연습현장 가다

입력
2004.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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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의 송추를 지나니 온통 짙푸른 숲 내음이다. 잠시 러브호텔의 밀림에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니,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3층짜리 푸른색 건물이 보였다. 양주시 백석면 홍죽리 675번지. 손진책이 이끄는 극단 미추의 본거지인 '미추산방'이다. 200석 규모의 극장을 중심으로 식당과 기숙사가 있고 건물 앞에는 야외극장, 뒤로는 연극학교가 있다. 텃밭도 있어 배우들이 야채를 직접 가꿔 먹는다. 연습장으로 쓰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건물 뒤편 숲에서 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많이 마셔야 몸 속에 피가 늘어나죠

극단 미추 단원들이 위화(余華)의 소설을 각색한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를 6월4일부터 7월4일까지 동숭홀에 올릴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극단 미추에게는 즐겁고 안타까운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즐거운 일은 배우이자 소품 담당인 김동영이 23일 서울연극제 참가작 '빵집'으로 연기상을 받은 것이고, 안타까운 일은 '허삼관매혈기'의 주인공 허옥란 역의 서이숙이 달리기를 하다 어깨에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일단 허진숙이 대본을 하루 만에 외우고 대신 연습에 들어갔다. 작년 4월 초연으로 큰 상을 여럿 받은 기대주 서이숙은 6월 초순에나 동숭홀 무대에서 볼 것 같다.

'허삼관매혈기'는 겉으로만 보자면 허삼관이라는 자의 피를 판 이야기다. 결혼, 큰 아들이 저지른 사고 뒤처리, 굶주림, 바람 피우기 등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넘긴다. 작가 위화는 비참하고 답답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을 채플린처럼 희극적으로 뒤집는다. 매혈에 나선 허삼관(이기봉)과 친구들은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신다. "물을 많이 마셔야 몸 속에 피가 늘어나죠!"

피 팔아 얻은 부자간의 진한 정

'허삼관…'은 마치 미추에게 꼭 맞는 옷처럼 보인다. 담백하면서도 자연스런 연기에 '허삼관'의 재미가 오롯이 살아났다. 허삼관이 피를 팔 때마다 천장에서 붉고 둥근 등이 내려왔다. 소박한 무대처럼 보이지만 배우의 연기와 재치 있는 대사가 꿈틀댄다. 문제는 21세기에 중국 문화혁명시기의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가 얼마나 먹힐 것이냐는 것. 미추의 상임연출가인 강대홍은 "신파로 흐르지 않으려 애를 쓴다"며 연극적 재미에 치중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이 연극의 뇌관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다. 허삼관이 마을에서 제일 예쁜 허옥란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서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첫 아들 일락이가 당최 자신을 닮지 않은 것이다. 격동의 중국 현대사는 밑그림이다.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진한 정이야말로 허삼관이 피를 팔아 얻은 소중한 가치다.

낳은 아버지와 기른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락(송태영)과 허삼관 허옥란이 얼마나 가족 같아 보이느냐에 연극의 성패가 달렸다. 일락을 맡은 송태영을 보고 아역배우라고 믿을 수도 있다. 해맑은 모습을 보고 여중생 관객들이 말을 걸어온다니 말이다. 허옥란 역을 맡은 허진숙을 진짜 아내로 둔 스물 일곱 살의 유부남인데도. 그래서 연극에서 아내의 아들 노릇이 더 애틋한지도 모른다.

비가 올듯 말듯 하늘이 변덕을 부렸다. 간염 걸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피를 팔러 갔다가 오히려 자신이 응급실에 실려 가는 허삼관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눈이 아리다. 야외무대 앞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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