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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재벌개혁, 진단따로 처방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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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재벌개혁, 진단따로 처방따로

입력
2004.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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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도상국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득을 창출하려면 기업을 세워야 한다. 자본과 기술을 해외에서 어렵게 끌어와도 능력 있는 기업가가 없으면 기업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유능한 기업가는 흔치 않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능성 있는 기업가를 발굴하고 지원하여야 한다. 제한된 숫자의 유능한 기업가들이 각각 여러 사업을 동시에 수행하려면 많은 기업을 동시에 지배할 수 있는 기업조직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느 기업인도 여러 개의 기업을 동시에 지배할 정도로 거액을 출자할 경제력은 없다. 상호 주식 보유의 재벌 체제는 자기자본이 달리는 기업가가 여러 기업을 계열사로 거느리는 데 합당한 체제였다. 재벌 체제는 몇몇 산업영웅들을 앞세워 전근대적 한국 경제의 잠재력을 최대한 결집함으로써 이 땅에 새로운 현대적 산업을 건설하는 기업 체제로 성공하였다.

재벌 체제는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정부 지원을 독식한 것은 그 불가피성이 어떠했든 대중의 반감을 샀다. 한국 경제의 경이적 도약을 선도한 재벌 체제였지만 재벌 문제는 언제든 심각한 사회문제로 불거질 폭탄이었다. 정경유착의 추문이나 상속세 없는 2세 승계 문제가 터질 때마다 재벌을 비난하는 여론은 드셌다. 경제력 집중, 문어발식 다각화와 선단식 황제경영은 재벌 문제의 단골 메뉴다. 역대 정부는 나름대로 재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재벌 문제의 핵심은 경제력 집중과 문어발식 다각화가 아니다. 총수가 근소한 개인지분으로 황제처럼 군림하는 것이 문제다. 재벌 체제의 독특한 소유 구조 때문에 총수는 근소한 개인지분만으로도 주주총회를 완벽하게 장악한다. 재벌 총수의 지위는 철옹성이며 2세 상속까지도 가능하다. 일반 주주들이 단결해도 개인지분 15%의 총수를 견제할 수 없는 것이 재벌 체제다. 총수의 경영 실패를 내부적으로 주주총회가 통제할 수 없고, 외부의 적대적 인수합병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총수는 거리낌없이 계열사들을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재벌 총수의 황제경영을 문제시하는 시장개혁 로드맵(일정표)의 기본시각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처방 가운데 시장지배력을 억제한다는 공정거래 차원의 정책은 문제다. 출자총액 제한 정책은 무분별한 계열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정부의 참뜻은 기업집단의 단순한 확장 저지보다는 총수의 비정상적 지배가 확산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부 견제 장치가 완비된 기업의 출자는 풀어주려는 것만 보아도 분명하다. 문어발 선단의 낙인을 받은 재벌이라도 내부 견제 장치만 제대로 갖추면 지금 그대로도 문제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출자총액 제한은 결국 대기업 집단의 규모와 다각화를 제한한다. 고쳐야 할 것은 지배구조인데 금지하는 것은 규모 확대다. 버릇 나쁜 아이의 몸을 자라지 못하게 꽁꽁 묶어두고 버릇을 고쳐야 풀어준다는 격이다. 버릇만 좋아지면 허약해도 좋은가? 황제경영을 끝내려고 출자를 제한하면 무한경쟁 시대에 미국, 일본의 거대 기업들을 어떻게 당하랴?

황제경영식 재벌 체제는 일반 주주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나라에서만 존속 가능하다. 개발 초기의 산업영웅들에게나 요긴하였던 기업 체제였다.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여야 하는 한국형 기업 체제가 결코 아니다. 초기의 창업주들은 기업 이익을 사적 이익에 앞세웠고 그 결과 산업왕국 건설에 성공하였다.

총수 지위를 대대로 상속까지 하는 이제 재벌 개혁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황제경영을 근절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당하게 피해 본 일반 주주들의 정당한 요구가 항상 관철되는 법적 환경을 만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황제경영이 안되면 재벌 체제는 쓸모가 없어진다. 공정거래 차원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에서 한참 빗나간 접근이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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