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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 <35> 대구 광신한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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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 <35> 대구 광신한약방

입력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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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藥令市)의 계절이 돌아오면 약전골목은 약초의 천국으로 변한다. 일년 365일 약초의 향기가 가실 날 없는 동네이지만 매년 봄 가을, 전국의 약초가 약전골목에 쌓일 때면 대구 전체가 그 향기에 흠뻑 젖는다. 그리고 흥겨운 약초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 것도 하루 이틀에 판을 접는 잔치가 아니라 한 달 동안 이어진다. 광신한약방(廣信韓藥房) 이용식(李龍植·64)씨는 잠들어 있던 유년의 기억을 그렇게 되살린다. 일제의 집회금지로 한동안 중단된 약령시가 광복 후 재개된 1940년대 후반, 그러니까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의 추억이다.약령시가 개시되면 할아버지의 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약재를 팔고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저녁이면 대구지역 유림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한학에 밝았던 할아버지의 친구들이 갓을 쓰고 찾아왔다. 권커니 잣커니 잔을 주고 받으며 취흥을 시 한 수에 담아냈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그를 곁에 앉혀 놓고 글씨 잘 쓰는 한학자들에게 체(서체)를 받아 손자에게 건네주곤 했다. 그 체를 보고 한자를 익히라는 배려였다. 저울대를 상아로 만든 약방저울과 저울집, 약재를 도매로 거래할 때 쓰던 큰 저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약장이 여전히 약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체취가 밴 유품이다.

3년 뒤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약전골목에서 가업 3대의 전통을 잇고 있는 한약방은 광신한약방이 거의 유일하다. 창업자는 용식씨의 조부 고 이기영(李基永)옹. 그는 할아버지가 1910년 전후로 한약방을 시작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옹은 나라 잃은 한을 달래며 지역사회에 이바지할 방도로 한약방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동안 광신한약방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다. 조부 대에는 제화당한약방(濟和堂漢藥房)이었다. 선친이 광신한약방으로, 용식씨가 漢藥房 표기를 韓藥房으로 바꿨다.

"70년대만 해도 한약방이 잘 됐습니다. 요즘보다 그 당시 매출이 더 많을 정도이니 정말 호시절이었지요. 오히려 교통과 통신수단의 발달이 약전골목의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경상도 일대의 약재는 원래 대구를 거쳐 전국적으로 소비됐지만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산지 농가들이 서울과 직거래를 하면서 약전골목의 경기도 시들어갔거든요." 용식씨는 영남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부친이 타계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가업을 잇게 됐다. 선친(李台鎭·이태진)은 30년대 후반 일본에 건너가 여러 해 인삼밭을 경작했을 만큼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용식씨는 "장남이라는 책임의식도 컸거니와 무엇보다 한약방의 경기가 좋았던 때라 새로운 길을 가고 싶었던 꿈을 접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독학으로 한약업사 자격증을 땄다. 한약업사는 약재판매는 물론 조제자격도 있다. 의료행위만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약사의 역할과 비슷하다. 한약업사 시험은 오래 전 폐지됐고 한약방을 내려면 한약학과를 나와 한약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한약사들은 한약방 대신 한약국이라는 명칭을 쓴다. 용식씨의 아들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대물림 수업을 하고 있다.

광신한약방의 비방은 보양강장제인 경옥고다. 조부 대부터 독창적인 비법으로 만든다. 매년 겨울 한 번 주문을 받는다. 선친이 약방을 운영할 때만해도 수십 년 동안 복용해온 단골만 100명이 넘었지만 이제는 많이 줄었다. 광신의 경옥고에는 인삼 꿀 백봉령 생지황 외에도 너 댓가지 약재가 더 들어간다, 용식씨는 동의보감외에도 선대부터 내려온 '오봉청랑결(五峰靑囊訣)과 방약합편(方藥合篇)을 토대로 약을 짓는다. 모두 풍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편찬된 의서들이다.

"보약의 기본처방은 당귀 천궁 작약 지황의 사물(四物)입니다. 사물은 피의 생성과 운행, 그리고 청혈작용을 돕는 약재입니다. 하지만 약보불여식보(藥補不如食補)라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밥이 보약이지요." 그 역시 보약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은 도가 지나치다고 꼬집는다. 대신 그는 날씨가 더운 계절에 좋은 건강음료 만드는 법을 소개한다. 여름철에는 제호탕(醍 湯)이 제격이다. 집에서 만들기도 쉽다. 백청(白淸·천연꿀) 한 되, 오매(烏梅·매실) 1냥(37.5g), 백단향(白檀香·향나무) 가루 0.8돈(한 돈은 3.75g), 축사(縮砂)가루 0.4돈, 초과(草果)가루 0.3돈의 비율로 약재를 마련한다. 약재를 약탕기에 넣고 끓기 시작한 뒤 30분쯤 더 다린다. 제호탕은 냉장고에 저장해 놓고 마시면 되는데 더위 해소에 아주 그만이다.

광신한약방이 다루는 약재는 향재(국산약재)와 당재(唐材·중국산약재) 합해서 백 수 십종쯤 된다. 약방마다 취향이 달라 필요한 약재만 구입하기 때문에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용식씨가 취급해온 약재 중에서 가장 비싸고 희귀한 것은 역시 사향이다. 사향노루가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이어서 이젠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60년대까지 팔공산에 사향노루가 서식, 심심찮게 사향을 구입할 수 있었다. 달걀보다 작고 탱자보다 큰 사향 한 개의 값은 150만∼300만원으로 당시 웬만한 집 한 채 값과 맞먹었다.

'의사는 먼저 병의 근원을 밝힌 다음 식이요법으로 고치도록 하되 그 방법이 듣지 않을 때에 약을 써야 한다.' 조선의 명의 허준(許浚)은 동의보감에서 의사의 자세를 그렇게 정리했다. 약에 대한 오남용을 경계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광신한약방의 긴 생명력은 아마도 그런 자세를 잃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민족 의약학 발전 기여

대구 약령시의 전통은 남성로 약전골목이 간직하고 있다. 길이 700여m의 도로 양편을 따라 한약방 50여 개, 한약도매업소(약업사) 100여 개가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약령시의 한약방들은 은밀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높았다고 한다. 약령시 전시관 1층에는 전국 유일의 (주)한약재도매시장이 개설돼 있다.

약령시는 조선 효종 9년(1658년) 대구감영 객사 부근에서 매년 음력 2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 달씩 한약재를 거래하던 계절시장이었다. 장소를 1907년 남문 밖 남성로로 옮기면서 이 일대가 세칭 약전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일제강점기 한동안 금지되던 약령시는 광복 후 재개됐지만 한국전쟁 이후 중단됐다.

약령시 설치는 민족 의약학의 발전과 연구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당재를 향재보다 귀하게 여겼고 많이 썼다. 조선시대 향재의 채취와 재배를 권장하면서 생산과 소비도 늘어났고 공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약재생산지를 중심으로 약령시를 설치했다.

그 중에서도 대구 전주 원주가 3대 시장이었지만 대구가 가장 번창했고 오래 존속했다. 300년 동안 유지됐던 대구 약령시는 세계의약학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로 평가 받는다.

조선시대 대구는 경상좌우도의 감영 소재지로서 행정의 중심이자 교통요지였다. 또한 대구 주변에는 약재생산지가 많아 약령시 발흥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소백산맥 일대는 물론 풍기(인삼) 군위(생지황) 영천(천궁) 낙동강유역의 다산(향부자) 등은 지금도 약재산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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